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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모더니즘 문학사조의 시대를 연 여류작가, 윌라 캐더


[인물 아메리카] 모더니즘 문학사조의 시대를 연 여류작가, 윌라 캐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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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에는 미국 중서부 개척민들의 불굴의 삶을 흥미진진하게 그려 퓰리처 상을 받고, 미국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윌라 캐더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이 시간에는 미국 중서부 개척민들의 불굴의 삶을 흥미진진하게 그려 퓰리처 상을 받고, 미국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윌라 캐더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9세기 후반, 미국에는 큰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미국은 농업으로부터 시작한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난 후 나라는 갈수록 공업화 돼갔습니다. 또 인구가 늘어나면서 미국은 더 이상 동질성을 가진 곳이 아니었습니다.

철도가 대륙을 가로 질러 대서양 쪽과 태평양 쪽을 연결하자 거대한 중부 대평원이 열리고 새로운 사람들이 밀려들었습니다. 스웨덴, 노르웨이, 폴란드, 러시아, 보헤미아, 독일 등 유럽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땅에서의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살을 에는 추운 겨울과 이글거리는 여름의 태양을 견뎌낸 사람들은 새로운 개척자가 됐습니다.

미국 여류 작가 윌라 캐더가 그려낸 사람들은 바로 이들이었습니다.

캐더의 명작중 대부분은 이들 개척자들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들이 추구했던 것, 그리고 얻은 것. 그들의 뒤를 따라온 사람들과의 어려운 관계도 이야기했습니다. 캐더는 아름답고 간결하게 글을 쓰는 개성을 개발했습니다. 그점에서는 캐더도 개척자였습니다.

캐더는 1876년 남부인 버지니아 주에서 태어났습니다. 8살이 됐을때 가족은 중서부 지방인 새로운 땅 네브라스카로 갔습니다.

윌라는 레드 클라우드(Red Cloud)라는 작은 읍에서 살았습니다. 아직 어린 아이였지만 윌라는 글 쓰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새로운 개척지에서는 드문 좋은 선생님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대학에 가는 여성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윌라 캐더는 네브라스카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캐더는 여러가지 교내 활동을 하면서 대학 문학지에 글을 썼습니다. 캐더는 1895년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녀가 살았던 당시에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문화의 중심지인 동부로 가기를 희망했습니다. 거기야말로 생기 넘치는 일이 많이 벌어지는 곳이었습니다. 그것은 광활한 대지 뿐인 곳, 중서부 문화로부터의 탈출이었습니다.

캐더는 1896년부터 1901년까지 핏즈버그 데일리 리더 신문에서 일했습니다. 이 신문사는 펜실배니아 주에 있기 때문에 아주 동부인 뉴욕은 아니지만 네브라스카 보다는 훨씬 동쪽에 위치한 곳입니다. 캐더는 1900년 소설과 시를 출판했습니다.

캐더는 1901년부터 5년 동안 핏즈버그 센트럴 고등학교와 부근에 있는 앨리게니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1903년에는 그녀의 첫 시집이 출간됐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에는 또 다른 책이 나왔습니다. 제목이 The Troll Garden으로 된 이 책에는 7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습니다.

그러자 뉴욕이라는 잡지를 발행하는 S.S. 매클루어 (발음 확인) 가 이 책을 읽고, 캐더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그리고 뉴욕 시로 와서 자신이 발행하는 잡지 매클루어스 매거진의 편집을 맡아줄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윌라 캐더는 드디어 문화의 중심지 뉴욕에서 일을 하게 됐습니다. 그녀가 잡지사에서 일한건 1906년부터 1912년까지 6년 동안이었습니다.

그녀를 잡지사에서 떠나게 만든건 당시 미국의 여성 작가 새라 오온 쥬웻트 였습니다. 쥬웻트는 캐더에게 기록물이 아닌 순수한 소설을 써보도록 권했습니다.

1912년 캐더는 ‘알렉산더의 다리’(Alexander's Bridge)라는 첫 소설을 발표했습니다. 그때에 이르러서는 캐더도 잡지사를 떠나 모든 시간을 창작 소설을 쓰는데 전념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쥬웨트의 조언을 생각하면서 캐더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사람들, 중서부의 농민들에 관심을 돌렸습니다.

자신이 살았던 레드 클라우드에는 보헤미아 출신, 프랑스계 캐나다인, 독일계, 스칸디나비아 반도 출신, 그리고 그외 여러 이민 집단이 섞여 살고 있었습니다. 캐더는 그들 혼합된 인종들이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는 현상을 보며 살았었습니다. 그것은 각자 살고 있던 나라에서 가지고 온 여러가지 것들을 혼합한 사회였습니다. 그녀가 소설에서 다루는 소재는 바로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모든 유명 작가들이 그렇듯, 캐더는 그의 소설이 자신이 묘사하는 세계를 독자들이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생애 후기에 그는 자신이 표현하는 방식을 설명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가구가 없는 소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이야기를 전하는데 불필요한 것은 모두 제거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캐더는 위엄 있고 단아한 필치로 모든 개개인의 생활에 새겨진 인간 역사를 그려나갔습니다.

19세기의 소설들은 사회적인 것을 매우 자세하게 묘사했습니다. 작가는 그런 것들을 여러 페이지에 걸쳐 묘사하고 논평했습니다. 캐더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지나간 것들을 들여다보기는 했지만 작품에서는 현재와 단절시켰습니다.

‘알렉산더의 다리’ 이후 캐더는 두번째 소설 ‘오,개척자여’(O Pioneers)를 펴냈습니다. 중서부를 배경으로 한 여러 소설의 첫번째 것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케더를 당시 최고의 작가 중 한명으로 인정받게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오,개척자여’는 보헤미안, 체크, 프랑스, 러시아, 스웨덴 출신 소 그룹들이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며 땅을 개척해 가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여성들의 억척스런 삶을 묘사했습니다.

캐더는 그들이 마치 자연의 거대한 힘처럼 살았다. 아니 어쩌면 그보더 더 강한 힘으로 살았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땅을 사랑했기 때문에 얻는 것이 적었어도 땅을 소유하고 살았다고 묘사했습니다. 캐더의 영웅들은 주인 없는 땅의 이름 모를 개척자들, 정착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 정신의 개척자들이기도 했습니다.

이- 캐더는 그들이 대륙을 가로 지르는 철길이 열리기를 꿈꾸는 사람들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에게는 더 큰 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하는 세계에서 결코 변치 않는 것, 즉 무질서한 것 처럼 보이지만 변치 않는 하나의 질서였습니다.

윌라 캐더는 1915년 ‘종달새의 노래’에서 계속 새로운 개척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썼습니다. 여기서도 주인공은 포기할줄 모르는 여성상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녀 최고의 작품이라고 평가하는 ‘나의 안토니아’를 내놓았습니다.

동부 버지니아에서 온 남성과 보헤미아에서 이민 온 여성이 네브라스카 개척지에서 만나 사랑하고 좌절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은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고,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1920년대 초 캐더는 신경쇠약으로 고통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었습니다. 우선 몸의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출판업자에 대한 불만도 컸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기술이 가져다 준 사회의 사회의 변화가 그녀를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때에 이르러서는 그녀의 이야기도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캐더는 승리보다는 패배에 더 많이 주시를 합니다. 캐더는 더 이상 위대한 꿈에 대해 쓰지 않고, 사람의 작아진 비젼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1923년 캐더는 네브라스카를 소재로한 마지막 작품, 잃어버린 레이디’를 썼습니다. 2년 뒤에 쓴 또 다른 소설 ‘교수의 집’은 그녀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같은 해에 나온 One of Ours, ‘ 우리것들 중 하나’ ’는 사라져가는 개척정신을 슬퍼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작품으로 캐더는 퓰리처 상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 나온 두 작품, ‘대주교의 죽음’ (Death Comes for the Archbishop)과 ‘바위의 그림자’(Shadows in the Rock)는 영웅적인 실패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대주교의 죽음’은 16세기 미국 남서부, 즉 오늘날의 뉴멕시코로 파견된 두 프랑스 신부의 경험을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종교적으로나 환경 적으로나 극도로 열악한 남서부 지역에서 벌어지는 선교사들의 생애를 흥미진진하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웅대한 뉴멕시코의 자연도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습니다. 그녀의 초기 작품들이 탄탄한 기반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면 후기의 작품들은 탄탄한 기반 그 자체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그것은 현대적 삶의 깊은 불만감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글은 어니스트 헤밍웨이, 스캇 핏쥐제랄드, 존 도스 파소스 등 신진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윌라 캐더는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1905년 네브라스카에서 온 여성 에디스 루이스(Edith Lewis)와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캐더가 죽을 때까지 함께 살았습니다. 루이스는 캐더의 편집인이었습니다. 캐더는 생의 마지막에 가까워지면서 “때때로 사람들은 우리를 실망시킨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올바르게 사는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캐더는 미국 문학계 최고 영예라 할수 있는 National Institute of Arts and Letters, 미국 예술, 문학 연구소로부터 금메달을 받았습니다.

캐더는 네브라스카 대, 콜럼비아 대. 예일대 등에서 명예 학위도 받았습니다. 캐더는 73세때인 1947년 뇌출혈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미국 문학의 새로운 장을 연 그녀는 동북부 뉴햄프셔 주에 묻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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