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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인기절정의 고민 상담 칼럼니스트, 에스더 폴린


[인물 아메리카] 인기절정의 고민 상담 칼럼니스트, 에스더 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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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에는 앤 랜더스라는 필명으로 미국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 신문 독자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었던 고민 상담 칼럼니스트, 에스더 레더러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시간에는 앤 랜더스라는 필명으로 미국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 신문 독자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었던 고민 상담 칼럼니스트, 에스더 레더러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에스더 레더러는 1955년부터 50여 년 동안 Ask Ann Landers 라는 상담 칼럼을 집필했습니다. 대도시 시카고의 한 신문에 실렸던 그녀의 칼럼은 세계 천여개의 신문으로 확산됐고, 이 칼럼을 읽는 독자의 수는 수천만명에 달했습니다. 에스더 레더러는 Dear Ann Landers로 시작되는 독자들의 편지를, 많을 때는 하루 2천통 이상이나 받았습니다. 간단 명료한 문장, 재치 넘치는 조언으로 이 칼럼은 세계의 독자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에스더 레더러는 1918년 7월 4일, 미국 중부 아이오와 주 쑤 시티(Sioux City)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에이브래엄 프리드먼은 러시아에서 이민온 분이었습니다. 부모들은 태어난

딸의 이름을 에스더 폴린 프리드먼 (Esther Pauline Friedman)이라 지었습니다. 그녀가 태어난지 수분 후 또 다른 쌍둥이 딸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부모들은 둘째 이름을 첫째 이름의 순서만 바꾸어 폴린 에스더라고 붙였습니다. 그래서 첫째는 에스더 폴린, 둘째는 폴린 에스더가 됐습니다.

헷갈리기 쉬워 부모들은 쌍둥이 언니를 에피(Eppie) 동생을 포포 (Popo)라는 애칭으로 불렀습니다. 이들에게는 언니가 두명 더 있었습니다. 아버지 프리드먼은 치킨 집을 하다 나중에는 여러 주에 극장을 소유한 성공적인 사업가가 됐습니다. 에피는 아버지로부터 윤리와 가치에 관한 많은 것을 배우며 자랐고, 그것이 자신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에피 레더러는 쑤 시티에 있는 모닝사이드 대학에 다녔지만 장차 신문사에서 글을 쓰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에피는 재학 중 쥴스 레더러라는 남성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레더러와 결혼을 하기 위해 1939년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레더러는 자동차 임대업을 했습니다. 버젯 렌트 어 카 (Budget Rent-A-Car)라는 이 사업체는 크게 번창했습니다. 레더러 부부는 1940년 외동 딸 마고(Margo)를 낳았습니다.

에피 레더러는 남편이 사업에 전념하는 동안 집에서 아이를 키우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동안 이들은 더 북쪽에 위치한 위스컨신 주로 옮겨가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에피는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리고 민주당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활발한 활동을 벌였습니다. 1955년 레더러 부부는 인접 주인 일리노이 주 대도시 시카고로 이동했습니다.

바로 그해 시카고의 유력 신문 시카고 선 타임스가 직원을 모집하고 있었습니다. ‘Ask Ann Landers, 앤 랜더스에게 물어보세요’라는 상담 칼럼을 쓰는 자리가 비어 새로운 작가를 모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신문사에 다니는 친구로부터 그런 사실을 알게된 에피 레더러는 지원서를 냈습니다. 응시자는 30명이었습니다.

시험 방식은 간단했습니다. 고민 거리를 하소연하는 독자들의 다양한 편지들을 주고 답을 써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에피는 친구들과 편지 내용을 이야기 하며 조언을 구했습니다. 어떤 독자의 편지는 남의 집에 있는 과일 나무가 자기 집으로 가지를 뻗어 열매를 떨어뜨리는데, 그걸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묻고 있었습니다.

이건 법률적인 문제라고 판단한 에피는 법을 전공하는 친구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운 좋게도 그 친구는 미국 대법원 판사 중 한명이어서 에피는 가장 알맞는 답을 쓸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 질문은 가톡릭 교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에피는 유명한 가톨릭 대학인 노틀담 대학 총장에게 문의해 답을 써 냈습니다.

시험이 마감된지 며칠 후 신문사에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전화를 받자 신문사에서는 “안녕하십니까? 앤 랜더스님!” 하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에피 레더러가 앤 랜더스 칼럼을 쓸 사람으로 결정됐다는 뜻이었습니다.

신임 앤 랜더스는 그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받은 대부분의 편지들은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로부터 왔고, 슬픈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앤 랜더스는 그런 사연들로부터 큰 아픔을 느꼈습니다. 선 타임스 신문의 편집인은 독자들의 사연으로 상처를 받지 말고 마음을 강하게 먹으라고 조언했습니다. 편집인은 또 자신과 독자들의 관계에 확실하게 선을 그어 객관적으로 글을 쓰라고 말했습니다.

앤 랜더스, 즉 에피 레더러는 나중에, 그 조언을 듣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좋은 칼럼니스트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상했습니다. 신문의 앤 랜더스 칼럼은 얼마 안돼 인기가 폭등했습니다. 에피

레더러의 글은 과거의 고민 상담 칼럼니스트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녀의 대답은 쉽고, 재미 있었습니다. 앤 랜더스는 독자들에게 마치 오랜 친구 처럼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때로는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있더라도 자신이 생각한 바를 그대로 썼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독자들은 앤 랜더스의 충고가 현명하고 상식이 통하는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앤 랜더스는 많은 유행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랜더스의 짧고 핵심을 찌르는 문장을 유행어로 자주 사용했습니다.

앤 랜더스는 독자들이 비판을 가할 때 그것을 피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조언을 비판한 독자들의 편지를 그대로 싣기도 했습니다.

다른 여러 신문들도 앤 랜더스 칼럼을 게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기가 상승하는 가운데 앤 랜더스는 자신의 칼럼에 많은 위기를 겪기도 했습니다. 칼럼에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반대 입장이거나 사회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주제들도 있었습니다. 앤 랜더스는 동성애, 알콜중독, 마약 중독, 어린이 학대 같은 것들도 다루어야 했습니다.

앤 랜더스는 정치적 쟁점도 다루었습니다. 앤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강한 반대 입장도 들어냈습니다. 총기 규제와 여성의 낙태권 지지자이기도 했습니다. 의학 연구를 위한 동물 이용은 찬성했습니다. 이같은 의견들로 앤 랜더스에게는 미국 총기협회, 낙태반대 세력, 동물 보호 기구 등 강력한 조직을 가진 적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압력에 앤 랜더스는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그룹들이 있어, 자신은 더욱 긍지를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정치적 활동은 때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1971년에 쓴 칼럼에서 앤은 암연구 활동을 위한 법 제정을 지지하는 글을 썼습니다. 그로 인해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국민들로부터 앤 랜더스 칼럼을 복사한 수십만통의 서신을 받았습니다. 얼마 후 닉슨 대통령은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는 미국 암 예방과 치료법안에 서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975년 에피 레더러, 즉 앤 랜더스는 변화했습니다. 남편 쥴스가 다른 여성을 사귀고 있다고 그녀에게 고백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상태는 몇년간 계속됐습니다. 급기야 두 사람은 갈라섰습니다.

이 사건 후 앤 랜더스의 부부관계 상담은 달라졌습니다. 지금까지 앤은 자녀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부부는 함께 살아야 한다고 충고해 왔습니다. 앤은 자신이 남편과 결별하기로 한 결정을 공개했습니다. 그러자 수십만명의 독자들이 앤 랜더스를 지원하고 동정하는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앤 랜더스는 문제를 안고 있는 부부들에게 카운슬링을 받으라는 권고는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결혼이란 한번 잘못된 후에는 수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에피 레더러의 쌍둥이 동생 포포도 고민 상담 칼럼니스트가 됐습니다. 그녀의 칼럼 이름은 Dear Abby, 친애하는 애비였습니다. Dear Abby도 천개가 넘는 신문에 게재됐습니다. 쌍둥이 자매의 경쟁은 분쟁으로 비화했습니다. 이들은 사이가 나빠져 5년 동안이나 서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에피 레더러의 딸 마고 하워드도 칼럼니스트가 됐습니다. 그러나 에피의 동생도, 딸도, 앤 랜더스 칼럼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시카고 선 타임스에서 시작한 앤 랜더스 칼럼은 시카고 트리뷴에도 실리게 됐고, 이어서 전 세계 천 200여개 신문에 연재됐습니다. 앤 랜더스의 상담은 매일 수천만명에게 읽혔습니다. 그것은 에피 레더러의 목표였습니다. 어떤 유명한

상을 받는 것 보다 많은 독자를 갖는 것이 그녀에게는 중요했습니다.

2002년 1월 에피 레더러는 심각한 골수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6개월 후인 6월 22일 83세로 숨을 거두었습니다.그녀의 죽음과 함께 앤 랜더스 칼럼도 신문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필명 앤 랜더스, 본명 에스더 레더러는 미국에서 정부의 정책을 바꿀 수 있는 가장 영향력 있는 한 사람으로 뽑히기도 할 만큼 한 시대를 풍미한 여류 칼럼니스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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