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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한국전 참전용사 헌신 기리는 김선화 씨…“희생 잊지 않을 것”


김선화 씨와 플로이드 코테이드 씨. 사진 제공: 김선화.
김선화 씨와 플로이드 코테이드 씨. 사진 제공: 김선화.

미국 남부에서 6·25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을 위한 웹사이트를 만들어 이들의 업적을 기리고 오랫동안 자원봉사 활동을 펼치는 한인 여성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영상 전문가 아들과 함께 참전용사들의 삶을 깊이 있게 조명하는 동영상을 만들어 박수를 받았는데요. 고령의 참전용사들은 VOA에 자유를 위해 가치 있는 일을 할 기회가 있어 감사했다며, 이를 다음 세대에 알리는 김 씨에게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했습니다. 김영권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살을 에는 장진호의 강추위 속에 중공군으로부터 맞은 총알이 몸 안에 박혀 있다는 사실을 37년이 지난 1987년에야 알게 된 로버트 랜스 전 미 해병대 병장.

휴전 후 성탄절에 전쟁고아들과 촬영한 사진을 펼쳐 보이며 이들을 찾기 원한다는 제임스 호번 씨.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주의 최대 도시인 뉴올리언스에서 43년째 사는 한국계 미국인 김선화 씨가 3년 전 아들 피터 씨와 개설한 이 지역 출신 6·25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을 위한 웹사이트(https://www.koreanwarvetsla.org)에 올려진 사연 중 일부입니다.

올해 74살로 한국전쟁 때 3살이었던 김 씨는 거의 15년째 이 지역 참전용사들의 손발이 되어 다양한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녹취: 김선화 씨] “다른 사람은 돌보는 이가 없으니까요. 행사는 하지만 이분들을 봐주는 사람이 없어요. 이제 연세도 많아지고 하니까. 그저 누가 이분들을 돌봐 드리고 우리 한국 사람이 감사하다는 것을 표시해야 하니까. 제가 그 일을 시작했죠.”

김 씨는 종종 참전용사들이 병원에 가는 일을 돕거나 생일과 성탄절 등 주요 연휴에 선물과 카드를 챙겨 보내고, 2년 반 넘게 계속되는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는 마스크와 음식 등을 제공하는 등 참전용사들에게 누이동생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녹취: 김선화 씨] “이분들이 정말 좋아하세요. 자기들을 생각해 준다고. 옛날에 그렇게 어렵게 싸우다가 (미국으로) 돌아왔잖아요. 그런데 아무도 여기서는 감사하다는 말도 없고. 행사도 거의 없고. 많이 돌아가셨어요. 그동안 40명은 돌아가시고 이제 29명이 남으셨어요.”

김선화 씨와 레스 크롬웰 씨. 사진 제공: 김선화.
김선화 씨와 레스 크롬웰 씨. 사진 제공: 김선화.

한국전쟁은 미국에서 한 때 ‘잊힌 전쟁(Forgotten War)’으로 불릴 만큼 큰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한국의 눈부신 경제 발전 등으로 지금은 ‘잊을 수 없는 전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미국 국방부에 따르면 북한 공산군의 침공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군은 비전투 사망자를 포함해 3만 6천 574명, 이 가운데 육군 481명을 포함해 루이지애나 출신 참전용사 589명이 한반도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미국 한국전쟁참전용사협회(KWVA) 직원인 쉴라 프리츠 씨는 5일 VOA에, 참전용사들이 모두 고령이라 하루가 다르게 규모가 줄고 있다며, 이 단체 등록 회원을 기준으로 지난달 현재 참전용사 8천 289명이 생존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몇 년 후면 참전용사 대부분이 세상을 떠날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김선화 씨는 다수의 참전용사가 전쟁 후유증으로 크고 작은 정신적·육체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녹취: 김선화 씨] “한국전쟁 때 하도 추워서 다리가 지금까지 아픈 분들도 많고, 총알이 몸에 있었던 분도 두 분 계시고, 손가락이 잘린 분도 계시고, 그때부터 너무 추어서 지금까지도 몸이 안 좋으신 분들…”

김 씨는 이런 참전용사들의 잊힌 업적을 기리고 후세들에게 이를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웹사이트를 만들고 전문 사진·영화 작가인 아들 피터 씨의 도움을 받아 참전용사들의 사진과 글, 이야기들을 차곡차곡 웹사이트에 올렸습니다.

특히 지난달 지역에서 열린 한국전쟁 발발 72주년 기념식에는 아들과 함께 지난해부터 제작한 참전용사들에 관한 동영상을 상영해 많은 참전용사가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고 행사 참석 관계자들은 말합니다.

이 영상은 한국전쟁 때 촬영한 사진 속 10대 후반~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검버섯과 함께 주름이 깊게 파인 노인으로 변한 모습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세월의 변화를 잔잔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중 일본에서 한반도를 오가며 육군의 상륙 훈련을 담당했고 전쟁 직후에는 경남 진해에서 1년간 한국 해병대 자문을 지낸 로버트 앨런 씨는 5일 VOA에, 한국전쟁 참전은 “유익한 임무였고, 그 임무는 완수됐다”며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앨런 씨] “I think it was a very good mission and mission accomplished. Also, I'd developed some good friendships with Korean marines in Jinhae”

앨런 씨는 김선화 씨와 일부 한국계 미국인들, 한국 정부가 지역 참전용사들에게 베푸는 여러 활동은 “환상적이고 정말 대단하다”면서 “아무도 (자신들에게) 그런 적이 없고 어떤 나라도 그런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앨런 씨] “I think it's fantastic. I think it's really a great thing. No one else has ever done that. No other country has ever done that. Sun Kim, she is doing beautiful work.”

앨런 씨는 특히 김선화 씨는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을 위해 아름다운 일을 하고 있다며 정말 고맙다고 말했습니다.

김선화 씨와 앨빈 케스테이 씨. 사진 제공: 김선화.
김선화 씨와 앨빈 케스테이 씨. 사진 제공: 김선화.

김 씨가 남달리 참전용사들을 돌보는 배경에는 가족사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김 씨의 부친은 일제 강점기에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한 기독교 목사로 미군 통역, 서울법대 전신인 경성법학전문학교 영어 교수 등을 거쳐 1949년부터 미국 VOA 한국어 방송에 근무했던 김성덕 씨입니다.

특히 한국전쟁 시기, 한국인들이 VOA 방송에 많은 의존을 할 때 김 씨는 유창한 영어로 생생한 전장 소식을 한국어로 번역해 방송하는 등 큰 활약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선화 씨는 조부 또한 일제 강점기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평양 최대 교회 가운데 하나인 서문외교회 담임목사를 지낸 김선두 목사, 아버지는 평양 두단섬 출신으로 모두 평양 출신 기독교 집안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배경 때문에 어려서부터 봉사 정신과 자유의 소중함을 배우고 자란 환경이 참전용사들에 대한 자원봉사에도 영향을 줬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김선화 씨] “(할아버지도 그렇고) 부모님은 진짜 봉사하시는 분들이셨어요. 그러니까 저에게도 봉사하는 심정이 다 왔죠. 그래서 제 일생도 봉사하고 사람을 도와주는 그런 것으로 살고 있어요.”

혹독하게 추운 한반도의 겨울을 잊지 못한다는 미 육군 중사 출신의 참전용사 플로이드 코테이드 씨는 김 씨 등이 한국 전쟁의 역사를 후손들이 숙고하도록 계속 시간을 내고 헌신하는 활동에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거듭 “우리의 인생 여정에서 무언가 가치 있는 일을 할 기회가 주어진 데 대해 감사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코테이드 씨] “We truly appreciate the continuing time and effort devoted in keeping the History of the Korean War alive for future generations to ponder…We are thankful that we were given the opportunity to do something of worth during our journey.”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다 남편과 지역에서 사업을 한 뒤 은퇴한 김선화 씨는 참전용사들이 모두 고령이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이분들을 섬기고 업적을 계속 알리는 데 전념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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