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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여성 역사의 달 기획] 탈북민 23년 도운 한인 표경숙 씨 “사랑은 오래 참아야 열매 맺어”


표경숙 씨가 20여년 전 중국 연길에서 탈북 꽃제비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
표경숙 씨가 20여년 전 중국 연길에서 탈북 꽃제비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

미국인들이 여성 역사의 달인 3월을 맞아 여성들의 다양한 업적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용히 미국의 가치와 기독교적 사랑의 나눔을 실천하는 한국계 미국인 여성들도 있습니다. 특히 미국 뉴저지주에 사는 표경숙 씨는 북한 고난의 행군 후기부터 중국 내 탈북 꽃제비 소년들과 인연을 맺은 뒤 이들이 한국에서 공부하고 정착할 때까지 후원자와 어머니 역할을 20년 넘게 조용히 하고 있어 주위에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김영권 기자가 표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미국 북동부 뉴저지주에서 자영 업체를 운영하며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에서 자폐 아동을 돕는 ‘사랑의 교실’ 교장을 맡아온 표경숙 씨(72세)는 지난 1999년 중국 연길을 방문합니다.

교회 단기선교팀 일원으로 별다른 사전지식 없이 방문한 연길 거리에서 표 씨는 탈북 꽃제비 아이들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녹취: 표경숙 씨] “진짜 거지 같고 아이들이 너무 못 먹고 얻어맞고. 어떤 면에서는 순진한 얼굴이 아니라 눈치만 보고. 어떻게 보면 이 아줌마를 이용해서 돈 좀 뜯을까 그런 아이들이었죠.”

고난의 행군 시기 굶주림을 참다못해 두만강을 건넌 수많은 탈북민들은 당시 연길 시내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남루한 옷차림의 꽃제비들은 서시장 등 번화가에서 행인들에게 돈을 달라고 구걸하고 일부는 돈을 주지 않으면 집요하게 행패를 부리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신분을 사업가 등으로 위장한 기독교 선교사들은 당시 이런 꽃제비 소년 소녀들에게 현지 조선족 동역자들을 통해 안식처와 음식을 제공했고 표 씨는 이곳을 방문해 꽃제비들로부터 또 다른 충격을 받았습니다.

[녹취: 표경숙 씨] “다음에 또 기회 있으면 보자 하고 나오는데 아이들이 갑자기 달려오다니 통곡을 하면서 우는거예요. 주찬이가 제일 먼저 나왔어요. 그리고 우는데 제 가슴이 철렁하면서 어머…그때 받은 충격을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어떤 아줌마가 와서 안아주고 뽀뽀해주고 하는데, 그 사랑이란 것을 사람으로부터 느끼는 감정이 처음이었다는 거에요. 사람이 다정하다는 게 충격이었다고 그래요.”

표 씨는 이런 아이들의 눈물을 보면서 가슴이 너무 아팠다고 말했습니다. 한창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뛰어놀 나이에 기근으로 부모를 잃거나 가족의 행방도 모른 채 낯선 중국까지 와서 중국인들에게 구걸하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다는 겁니다.

[녹취: 표경숙 씨] “너무 우리 아들 같은 아이들이더라고요. 눈동자도 그렇고 동족이란 게 너무 느껴지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이 너무 많이 아팠고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모든 아이가 다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어요. 그런 강렬한 마음이 있어서 매년 (중국에) 갔죠.”

미국 교회의 지원으로 산장을 빌려 수십 명의 아이들과 공안의 감시를 피해 예배와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민속촌으로 소풍(들놀이)도 가며 얼굴이 점점 밝아지는 아이들 모습에 가슴이 뭉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꽃제비 아이들이 중국 공안에 체포돼 북송된 뒤 구타와 고문을 받은 이야기를 전해 들을 때마다 김씨 정권에 대한 분노와 원망도 많았다고 표 씨는 회고합니다.

[녹취: 표경숙 씨] “정말 악의 축이죠. 인간이 살 곳이 아니니까. 아이들이 잡혀가서 (보위원으로부터) 두들겨 맞았다는 얘기를 들으면 정말 화가, 북한 정권은 말도 안 통하니까 하나님한테 화가 났어요.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냐 아이들을…지금도 아이들이 자고 일어나면 이를 악물고 꾸부정하게 일어나요. 그 트라우마가 평생을 가는 거예요. 아이들의 이가 다 부실해요. 하도 물고 자서.”

이후 탈북민들과 선교사들에 대한 중국 공안 당국의 대대적인 단속으로 상황이 악화되자 고민 끝에 한국행을 시도했지만, 라오스로 이동하다 30여 명 중 3분의 2가 공안 당국에 체포돼 북송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신앙심이 강했던 한 소년은 감옥에서 고문으로 숨졌고 일부는 우여곡절 끝에 탈출해 다시 탈북하면서 꽃제비 소년 소녀 20여 명이 한국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표 씨는 이때부터 미국의 교인들과 지인들을 집요하게 설득해 10대 중반이었던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매달 1인당 미화 200~300여 달러의 장학금을 10여 명에게 지난 15년 가까이 제공했습니다.

[녹취: 표경숙 씨] “우리의 자식들이니까. 또 한국에 와서 공부해야 하는데 아이들이 엄청 똑똑했고. 공부하고자 한다 아이들이. 우리 자식들이니까 도와야 한다. 한 번 만나게 해주셨으니까 끝까지 해야 한다.”

표 씨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얘기를 듣고 지정헌금을 선뜻 하는 것을 보면서 “이 일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깨닫고 매년 한국에 가서 아이들을 만나 시간을 함께 보냈다”고 말했습니다.

물질뿐 아니라 아무 연고도 없는 아이들에게 정서적으로 의지할 누군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란 겁니다.

하지만 북한이나 중국과 전혀 다른 낯선 한국에서 공부를 시작하면서 탈북 청소년들은 많은 방황을 했고, 일부는 거짓말도 하고 여러 사고를 치면서 표 씨는 실망했고 포기하고 싶은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자신의 마음을 꽉 붙든 것은 ‘사랑’이었다고 표 씨는 말합니다.

[녹취: 표경숙 씨] “그 아이들은 소망이 없다, 북한 아이들이 얼마나 못된줄 아니? 교회 와서 사기 치고. 그런데 나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 이상했어요. 북한은 정권이 나쁜거지 국민은 너무 불쌍하죠. 그래서 우리가 많이 참아야 하는데 남한 사람들이 그것을 좀 못해요. 거기 있는 분들이 인격적으로 남한 사람들과 같지 않잖아요. (여러 꽃제비들이 처음에) 거짓말하고 사기 치고 하는 것은 배운 게 그거고 그렇게 안 하면 살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것을 한두 번 겪으면 그냥 내쳐요. 정떨어진다고 (한숨).”

이런 사랑으로 꽃제비 청소년들은 여러 좌충우돌 끝에 정상적인 궤도에 올랐고 이 가운데 7명은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뒤 성직자가 됐습니다.

김주찬 목사의 대학 졸업식 사진.
김주찬 목사의 대학 졸업식 사진.

최근 한국 연세대학교 대학원 상담코칭학 박사과정을 수료한 뒤 위로재단을 설립해 탈북민 등 빈곤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활동을 하는 김주찬 목사도 이 가운데 한 명입니다.

[녹취: 김주찬 목사] “사람의 변화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누군가 끝까지 믿어주고 신뢰하고 기다려주고 수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역할을 가장 잘해주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변함없이.”

김 목사는 중국에서 아무 희망이 없던 자신과 친구들이 이제 대부분 한국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해 자녀를 낳고 직장에 다니며 무난하게 정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표 씨처럼 자신들을 끝까지 믿고 기다려준 분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중국과 한국에 해마다 와서 자신들을 격려해 주고 어려울 때마다 도와주며 같은 편이 되어준 표 씨는 “마더 테레사와 같은 숨은 영웅과 같다”는 겁니다.

[녹취: 김주찬 목사]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든지 그런 것에 영향받지 않고 정말 진심 어린 어머니 같은 애정을 갖고 변함없이 헌신적으로 하셨던 것이 마더 테레사처럼, 어떻게 보면 탈북민 아이들과 관련해서 중국에서 보호받지 못할 때는 당연히 보호해야 하니까 그게 이유가 되지만, 남한에 와서 시간이 지나면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너무 과하다 싶지 않냐 주위에서 그랬을 텐데, 그런데도 끝까지 하시는 게 그것은 정말 진심이 아니면 안 되는 거죠.”

표 씨는 거리에서 아무 희망이 없던 꽃제비 아이들이 성직자가 되어 자신이 겪은 삶과 받은 사랑을 나누면서 북한에 대한 희망을 사람들에게 불어넣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기적이고 은혜구나”하며 자주 감격하곤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겨우 72세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탈북 자녀들과 북한 주민들을 섬길 날을 고대하고 있다며, 북한인들은 가난하지만 강인하기 때문에 반드시 희망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표경숙 씨] “사랑은 오래 참는 겁니다. 정말로. 그래서 우리가 오래 참아야 합니다.”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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