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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미국 금융체제 구축' 알렉산더 해밀턴


[인물 아메리카] '미국 금융체제 구축' 알렉산더 해밀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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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중요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인물 아메리카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는 미국의 정치와 금융 체제의 기틀을 놓은 알렉산더 해밀턴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이 시간에는 미국 건국 선조의 한 사람으로, 미국의 정치와 금융 체제의 기틀을 놓은 알렉산더 해밀턴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정치가이자 법률가이며, 사상가였던 해밀턴은 독립전쟁에 나가 싸웠고, 미국이 아직 국가로서의 틀을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정부 체제를 구축하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워낙 뛰어난 지도자였지만 그러다보니 정적도 많았습니다. 여러가지 정치, 사상적 논쟁 속에 그는 정적과의 권총 대결에서 목숨을 잃은 비극적인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1755년이나 1757년 영국령 서인도제도의 네비스 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서인도 제도에 정착한 프랑스 계 여성으로, 이름은 라첼 라비엔이었습니다. 해밀턴의 아버지가 누군인지도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스코틀랜드에서온 가난한 사업가 제임스 해밀턴이라고 말합니다.

라비엔 여인은 남편과 결별한 다음 알렉산더 해밀턴과 함께 살았습니다. 해밀턴이 열한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람들은 어린 해밀턴에게 버진 아일랜드의 싼타 크루스 섬에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회계장부를 정리하는 보조 서기일을 했습니다.

어린 해밀턴은 별난 아이였습니다. 다른 어린이들이 놀이를 할때 그는 북 아메리카 식민지의 정치인이 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는 구할수 있는 책이면 영어든, 라틴어든, 그리스 어든 모두 읽었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기업과 경제에 관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생각을 강력하고 분명하게 말과 글로 전달하는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가 17살이 되던 해 여름 허리케인이 몰아치자 해밀턴은 자연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존재에 관한 글을 썼습니다. 그의 글은 지역 신문에 실렸고, 글을 읽은 섬의 유지들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돈을 모아 해밀턴을 뉴욕에 가서 공부를 하도록 해주었습니다. 해밀턴은 킹스 칼리지, 오늘날의 콜럼비아 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아메리카 식민지는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해밀튼은 보스톤의 식민지인들이 영국배에 올라가 차를 모두 바다에 던져버린 사건이 발생하자 이들을 지지하는 글을 썼습니다. 킹스 칼레지 교수들과 학생들은 해밀튼의 글과 말 솜씨에 감탄했습니다.

1776년, 13개 식민지는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독립 선언은 전쟁을 의미했습니다. 해밀턴은 킹스 칼레지를 떠나 독립군에 가담했습니다. 해밀턴은 뉴욕 야전포병대 대위로 임관됐습니다. 그는 롱 아일랜드, 화이트 플레인스, 트렌튼 등 여러 곳의 전투에서 싸웠습니다.

1777년 그는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중령으로 진급됐습니다. 독립전쟁에서 싸우는 동안 그는 조지 워싱턴 장군의 눈에도 띄었습니다. 워싱턴 장군은20대의 새파란 청년을 최측근 부관으로 임명했습니다. 해밀턴의 역할은 사실상 워싱턴의 참모장이었습니다. 해밀턴은 나이가 23세나 많은 사령관을 보좌하면서 깊은 신임을 얻었습니다.

그후 5년 동안 해밀턴은 중요한 워싱턴 장군의 문서를 작성하고 대륙군의 전략과 구조 개선을 위한 다수의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는 혁명군에게 조달될 물건과 자금을 모으기 위해 자신의 모든 정치적 역량과 언변을 동원했습니다.

1780년 해밀턴은 혁명군 장성의 딸인 엘리자 스카일러와 결혼했습니다. 처가인 스카일러 가문은 뉴욕의 정상급 명문가였습니다. 해밀턴 부부는 25년간의 결혼생활을 통해 여러명의 자녀를 두었고 결혼 생활 내내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한때 해밀턴은 마리아 레이놀드 라는 유부녀와 불륜 관계를 갖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내 엘리자는 여전히 해밀턴을 사랑했고 그에게 충직했습니다. 이 사건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섹스 스캔들로 간주되는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또한 그후 정적들이 끈질긴 비난을 가하는 빌미가 됐습니다.

책상에 앉아 일하는데 따분해진 해밀턴은 다시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독립전쟁 최후의 결전장인 요크타운으로 가 싸웠습니다. 이 전쟁에서 패한 영국은 결국 아메리카 합중국의 독립을 인정했습니다.

워싱턴 장군을 떠난 해밀턴은 집중적으로 법률을 공부한 다음 1782년 변호사 자격증을 땄습니다. 그리고 뉴욕 시에서 변호사 업을 시작했습니다. 해밀턴은 뉴욕 주 하원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로 진출했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해밀턴을 1789년 초대 재무장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워싱턴 장군의 부관으로 일할때 부터 해밀턴은 식민지 체제의 허약함을 실감하고, 강력한 중앙정부가 필요하다는 믿음을 갖게 됐습니다. 강력한 국가가 되는 길은 공업 발전에 있다고 믿는 그는 공업국으로 갈수 있는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독립 전쟁 동안 발생한 비용으로 거대한 부채를 안고 있었습니다. 해밀턴은 연방정부가 각 주의 전쟁부채를 책임지도록 하고, 이 부채와 외채를 해결하기 위해 소비세 제도, 국립은행 설립, 그리고 보호관세를 추진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들은 곧 미국의 산업을 진흥시켰습니다.

그러나 해밀턴이 내놓은 정책들은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토머스 제퍼슨과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해밀턴은 산업 사회, 강한 중앙정부, 그리고 귀족주의적 권력을 대표한 반면 제퍼슨은 농업사회, 강한 주정부 그리고 정치적 민주주의를 대표했습니다.

해밀턴은 정부 제도와 절차에 관심이 있었고, 제퍼슨은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중요시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결국 양당제가 태동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해밀턴에게는 또한 많은 정적들이 생겨났습니다.

해밀턴은 연방정부 기능과 경제를 크게 안정시키고 1795년 1월 초대 재무장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는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한 뒤에도 자신이 창간한 ‘뉴욕 이브닝 포스트’ 신문을 통해 정치적 이념을 피력하는 등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조지 워싱턴도 계속 정책 현안에 관해 해밀턴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1800년 3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습니다. 선거에는 공화파의 토머스 제퍼슨과 연방파의 에런 버(Aaron Burr)가 경합을 벌였습니다. 1차 선거인단 투표에서 두 후보는 똑같이 73표를 얻어 무승부가 됐습니다. 에런 버를 결함이 많은 사람으로 본 해밀턴은 하원에서 같은 당 소속인 버가 아니라 제퍼슨을 지원했습니다. 결국 제퍼슨이 3대 대통령으로 선출됐습니다. 차점자인 에런 버는 당시 관례대로 부통령에 올랐습니다.

1804년에는 뉴욕 주지사 선거가 실시됐습니다. 이 선거에는 에런 버도 출마했습니다. 이때도 해밀턴은 에런 버를 반대하고 공화파 후보를 지지했습니다. 근소한 차이로 뉴욕 주지사 선거에서 낙선한 에런 버는 사사건건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해밀턴에 대해 격노하며 결투를 신청했습니다

해밀턴은 1801년에 그의 아들이 결투로 목숨을 잃은 탓에 결투를 원치 않았지만, 자신의 명예를 위해 마지못해 받아들였습니다. 1804년 7월 11일 새벽, 두 사람은 뉴저지 주 위호켄에서 54구경 칼리버 권총으로 1대1 대결을 벌였습니다. 두 사람은 신호에 맞추어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해밀턴이 쏜 총은 빗나갔습니다. 그러나 버의 총은 해밀턴에게 골반과 척추를 관통하는 중상을 입혔습니다.

부상한 해밀턴은 뉴욕으로 실려갔다가 그 다음 날 숨졌습니다. 해밀턴은 뉴욕 시 맨하튼에 있는 트리니티 교회 묘지에 묻혔습니다. 그가 타계한 후 미국 여러 곳에 그의 동상과 기념비가 세워지고 그의 이름을 딴 지명들이 등장했습니다.

미국은 10달러 짜리 지폐에 초대 재무장관인 그의 초상을 올려 놓고 그의 공헌을 기리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아닌 인물로 지폐에 얼굴이 나와 있는 인물은 벤자민 프랭클린과 해밀턴 두 사람 뿐입니다. 제 30대 칼빈 쿨리지 대통령은 미국이 해밀턴의 위대함을 망각하는 때에 미국은 더 이상 위대한 국가가 아니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는 현대 자본주의 미국을 만든 역사상 가장 건설적인 정치가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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