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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실용주의 교육의 선구자, 존 듀이


[인물 아메리카] 실용주의 교육의 선구자, 존 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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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주의 교육운동으로 미국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존 듀이는 미국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현대철학과 교육학, 특히 교육철학분야에서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존 듀이는 교육이란 실제생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사회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운 교육자이며,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였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도 강한 그는 학교제도와 시민사회를 개혁하는데도 앞장섰습니다.

존 듀이는, 40여권의 저서와 천여편의 방대한 저작물을 냈습니다. 그의 저서가 다룬 분야는 심리학, 철학, 교육이론, 문화, 종교, 정치 등 실로 다양했습니다.

존 듀이는 1859년 10월 20일, 미국 북동부 버몬트 주에서 네 형제 중 세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아치볼드 듀이는 문학을 매우 좋아해서 영국 작품을 많이 읽었고, 아들에게도 그 영향을 물려주었습니다. 어머니 루시나는 기독교의 도덕적 가르침에 매우 엄격한 분이었습니다.

존은 어려서부터 부근에 있는 아일랜드계 사람들과 프랑스계 캐나다인 등을 통해 다른 문화에도 친숙해졌습니다. 존은 또 신문배달도 하고, 목재 야적장에서 일을 하면서 세상을 배웠습니다. 남북 전쟁때는 북군에 입대한 아버지를 면회하러 버지니아에 갔다가, 전쟁의 참혹함을 현장에서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존은 버몬트 주에서 공립학교를 다녔습니다. 명석한 그는 불과 15살에 버몬트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과학에서 가장 뛰어났으나 차츰 학년이 올라가면서 심리, 종교, 윤리, 논리학 등을 더 좋아하게 됐습니다. 대학에서는 특히 철학을 좋아했습니다. 그는 4년 후 졸업반에서 2등으로 대학을 마쳤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대부분 철학교수들이 종교계 인사들로, 창의적 사고보다는 종교적 아이디어에 더 중요성을 두었습니다. 특정 종교과 연관이 없는 철학 교사란 극히 드물었습니다. 듀이는, 철학과 심리학을 더 공부하기 위해 비 종교적 교수가 있는 존스 홉킨스 대학으로 갔습니다.

듀이는 1884년 헤겔의 순수이성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후 듀이는 여러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왕성한 저술활동을 전개했습니다.

듀이는 미시간 대학교 부교수로 재직 중 해리엇 앨리스 칩맨을 만나 1886년 결혼했습니다. 이들은 6명의 자녀를 낳았고, 한명을 입양했습니다.

1894년에는 시카고 대학으로 옮겨 철학과 학과장으로 10년 동안 일했습니다.

1904년에는 시카고를 떠나 아이비리그 대학인 콜럼비아 대학 철학교수로 갔습니다. 콜럼비아 대학교는 그가 교수직에서 물러날때까지 재직한 곳이었습니다. 1930년에 그는 명예교수로 콜럼비아 대학에서 은퇴했습니다.

존 듀이는 진보적 교육개혁의 강력한 주창자였습니다. 그는 교육이란 실제로 그 무엇인가를 실행하는데서 얻어진다는 원칙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1894년 듀이는 부인과 함께 시카고 대학 안에 실험적인 초등학교로 University Elementary School을 열었습니다. 목적은 자신의 이론을 실험해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총장이 부인 해리엇을 해임하자 그곳을 떠났습니다.

듀이는 역사학자 찰스 베어드,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렌, 역사학자 제임스 로빈슨 등 동료들과 함께 뉴욕시에 The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를 설립했습니다. 흔히들 뉴 스쿨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인문, 예술, 사회 과학의 자유로운 지적 아이디어를 주고 받는다는 교훈을 갖고 있습니다.

이 학교는 현재 파킨슨 디자인 스쿨, 사회연구대학, 유진 랭 교양대학, 마네스 음악대학, 재즈 현대음악대학, 드라마 대학, 공공고용대학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920년대 듀이는 일본, 중국, 터키, 멕시코, 러시아 등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교육개혁에 관한 강의를 했습니다.

교수직을 물러난 1930년대, 그는 뉴욕 교사 연맹, 학문의 자유를 위한 국제 연맹을 포함한 여러 교육관련 기구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자신이 편집인으로 있던 정기 간행물 ‘새로운 공화국’ (The New Republic)에 많은 글을 쓰면서 존 듀이는 그 시대에 가장 주목받는 사회 평론가라는 명성을 쌓았습니다. 그는 죽음에 가까이 갔을 때 까지도 글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존 듀이는 민주주의가 최선의 정부형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민주주의는 산업혁명으로 인해 잘못돼 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산업화는 사회 전체에 이익을 가져다 주지 못하고 소수의 사람들만을 위해 단시일 내에 막대한 부를 창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같은 위협은 올바른 교육을 시행할 수 없게 한다고 믿었습니다. 1920년대의 진보적 교육운동은 그같은 듀이의 사상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주요 정치단체, 즉 정당들이 대기업의 종으로 전락했다고 보는 듀이는 ‘인민의 로비’라는 기구를 만들고 그 총재가 됐습니다.

이 기구는 자기들이 원하는 후보, 즉 대기업의 하수인이 되는 대신, 일반 시민의 사회적 이익을 추구하는 후보를 내세우기 위해 로비를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듀이는 노동계 지도자들이 국민의 당(People’s Party)을 창당해 1948년 대통령 선거에 후보를 내세우도록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1927년에 첫 부인을 떠나보낸 듀이는 1946년 87세때 로버타 그랜트라는 미망인과 재혼했습니다. 결혼 후 듀이 부부는 로버타 부인의 유산과 듀이의 저작권 수입으로 살았습니다.

일부 역사가들은 존 듀이를 좌파 성향 학자라고 평하기도 하고, 위험 수준의 극단주의자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러는 동시에 그는 미국 공산당으로부터도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스탈린 주의를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한 칼 맑스 철학과도 다른 주장을 하면서 자신을 민주적 사회주의자라고 규정했습니다.

1952년 6월 1일, 교육개혁과 모든 사람의 권리를 보호하는데 일생을 바친 존 듀이는 92세를 일기로 뉴욕 시내의 아파트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사인은 폐렴이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모교인 버몬트 대학교 묘지에 안장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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