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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미국 여성 투표권을 쟁취한 지도자, 수전 앤서니


[인물 아메리카] 미국 여성 투표권을 쟁취한 지도자, 수전 앤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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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미국 여성의 투표권 쟁취를 주도한 지도자 수전 앤서니의 이야기입니다.

미국의 여권운동 지도자 수전 B. 앤서니의 초상화.
미국의 여권운동 지도자 수전 B. 앤서니의 초상화.

1776년 신생 아메리카 합중국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모든 인간은 생명과 자유,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고 명시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합중국의 모든 시민이 그런 권리를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성들에게는 투표권이 없었습니다. 건국 초기 투표권은 토지를 갖고 있으며, 글을 읽을 줄 아는 백인 남성들에게만 주어졌습니다.

1860년에는 토지 소유와 관계없이 21세 이상 백인 남성이면 대부분 투표권을 갖게 됐습니다. 1868년과 1870년 통과된 14차, 15차 수정 헌법으로 흑인 남성들에게도 투표권이 주어졌지만, 여성은 여전히 빠져있었습니다. 여성들에게는 경제권도 없었습니다.

미국 여성들은 수십 년 동안 투표권을 얻기 위한 힘든 투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운동을 주도한 여성 중 한 명이 매사추세츠주 출신 수전 B. 앤서니였습니다. 수전은 여성도 경제적 독립과 각자의 자주성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또 여성이 남성과 똑같은 권리를 갖지 않는 한 여성뿐 아니라 미국 사회의 개선도 없다고 믿었습니다.

수전 앤서니는 1820년 미국 동부 매사추세츠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앤서니 집안은 퀘이커 교도였습니다. 퀘이커 교도들은 여성의 권리를 중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를 선정할 때도 남녀를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앤서니 가족은 수전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뉴욕주 로체스터로 옮겨 살았습니다. 수전 앤서니는 아버지가 설립한 학교에서 초등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후 필라델피아 근교에 있는 기숙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학교를 마친 다음에는 17세부터 32세 때까지 퀘이커 신학교, 뉴욕주 여학교 등에서 교사로 일했습니다.

수전은 여성이 정치적 힘이 없는 한 온전한 시민이 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정치적 힘을 갖기 위해서는 투표권이 있어야 했습니다. 수전 앤서니는 뉴욕주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여성의 투표권 운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정작 여성들이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수전은 그 이유가 여성들이 오랫동안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조건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수전 앤서니는 큰 도시는 물론 작은 마을까지 일일이 돌아다니며 학교, 교회, 그 외 공공장소에서 회합을 가졌습니다.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수전은 여성의 권리를 촉구하는 팸플릿을 돌렸습니다. 뉴욕주 의원들에게는 여성의 재산 소유권을 인정하도록 주 법을 개정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뉴욕주의 운동은 당시로써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여성 권리 투쟁에 진전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1851년 수전 앤서니는 여성의 평등권을 위해 싸우는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을 비롯해 노예 해방운동가 등 여러 지도자를 만나 공동 노력을 펼쳤습니다. 최초의 중요한 진전은 1860년에 이루어졌습니다. 뉴욕주가 기혼 여성법이라는 것을 드디어 통과시킨 것입니다. 이로써 뉴욕주에서는 처음으로 여성도 재산을 소유할 수 있게 됐습니다. 또 여성은 자기가 번 돈에 대해 자신이 권리를 갖게 됐습니다. 이후부터 수전 앤서니의 운동은 다른 곳으로도 확산되고 결실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수전 앤서니는 1868년 흑인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미국 수정헌법 14조가 승인되자 그 조항에 여성 투표권을 포함하도록 하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운동은 결실을 맺지 못했습니다.
수전 앤서니는14 수정조항의 불합리성을 따지기 위한 행동을 단행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미국 뉴욕시 센트럴파크 공원에 여권운동 개척자인 소저너 트루스, 수전 B. 앤서니,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미국 뉴욕시 센트럴파크 공원에 여권운동 개척자인 소저너 트루스, 수전 B. 앤서니,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1872년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습니다. 율리시스 그랜트 현임 대통령과 호레이스 그릴리 민주당 후보의 대결이었습니다.

투표 날 수전 앤서니는 한 무리의 여성들과 함께 뉴욕주 로체스터에 있는 투표소에서 기표했습니다. 그로부터 2주 후 수전 앤서니는 불법 투표 혐의로 체포됐습니다.

재판이 열리기 전 수전 앤서니는 뉴욕주 여러 곳을 돌며 각종 집회에서 여성의 투표권 거부의 부당함을 규탄했습니다. “이 나라를 건설한 사람은 남성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입니다. 우리는 국민의 절반이 아니라, 우리 후손의 절반만이 아니라, 남자나 여자 모두가 누리는 자유를 위해 나라를 건설했습니다. 여성의 투표권이 없다면 다른 모든 권리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앤서니는 법을 위반했다며 결국 유죄 판결을 받고 10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수전 앤서니는 그 법이 잘못된 것이라며 벌금 납부를 거부했습니다.

이 사건이 있고 나서 수전 앤서니는 영웅이 됐습니다. 수전 앤서니는 계속 수정헌법을 통한 여성 투표권 운동을 벌였습니다. 수전 앤서니는 75세가 될 때까지 전국을 돌며 이 운동을 추진했습니다. 1893년 시카고 세계 박람회와 오리건주의 ‘루이스앤드클라크’ 박람회 등 여러 전국적인 행사에도 나가 연설했습니다.

1899년과 1904년에는 영국 런던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 여성회의에 미국 수석대표로 참석해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1904년 수전 앤서니는 마지막으로 연방 상원 관련 위원회에 나가 다시 한번 여성의 투표권을 주장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수전 앤서니는 승리를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이루어지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예상대로 수전 앤서니는 생전에 여성 참정권이 전국적인 차원에서 달성되는 걸 보지 못했으나 그동안 이루어진 성과에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결혼 여성의 법적 권리는 대부분 지역에서 인정됐습니다.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대부분의 전문 분야에도 최소한 몇 사람씩의 여성들이 진출했습니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전무했던 여자 대학생은 3만6천 명이나 됐습니다. 사망하기 2년 전 수전 앤서니는 “지난 50년 동안 세계는 여성의 영역에서 이보다 더 큰 혁명을 목격한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수전 앤서니는 86세 때인 1906년 3월 13일 로체스터에서 타계했습니다. 그로부터 14년 후인 1920년 8월 26일 남녀에 따라 투표권이 거부돼서는 안 된다는 수정헌법 제19조가 통과됐습니다. 그
수정조항은 앤서니 수정헌법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미 우정국은 1936년 위대한 지도자 시리즈 우표에 수전 앤서니 우표를 발행했습니다. 1979년에는 1달러짜리 수전 앤서니 은화가 발행됐습니다. 미국 화폐에 여성의 얼굴이 등장한 건 수전 앤서니가 처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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