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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화려한 인생 외로운 종말, 하워드 휴즈


하워드 휴즈가 보잉-100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하워드 휴즈가 보잉-100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다양한 분야에서 미국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화려한 인생 외로운 종말, 하워드 휴즈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하워드 휴즈는 영화제작, 항공업, 방위산업, 전자, 매스컴, 제조업 등 많은 분야의 사업을 벌여 세계 최고 수준의 부와 영화를 누렸지만, 고독하게 생을 마감한 인물이었습니다.

휴즈는 1905년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하워드 휴즈 시니어는 석유 개발 붐이 일던 텍사스에서 시추용 장비를 개발해 많은 돈을 모은 사업가였습니다. 휴즈는 어린 시절부터 과학과 기술에 흥미와 재능이 있었습니다. 그는 텍사스주의 명문 라이스대학과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캘텍)에서 수학과 항공 공학을 공부했습니다.

행복했던 휴즈는 그러나 10대에 부모를 모두 잃었습니다. 어머니는 자궁외 임신으로,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2년 간격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휴즈는 학업을 중단하고 로스앤젤레스로 갔습니다. 그리고 동경했던 영화 제작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새로운 분야였지만 휴즈는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1927년 <모두가 연기하고 있어요>를 시작으로 그가 제작한 영화들은 흥행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여러 분야의 아카데미 상을 받았습니다. 휴즈의 영화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공중전을 소재로 한 <지옥의 천사들>이었습니다. 막대한 예산을 들인 ‘대형 영화’였습니다.

휴즈는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까지 맡았습니다. 프로펠러 전투기를 87대나 구입하고 이를 조종할 최고의 비행사들도 고용했습니다. 휴즈 자신도 스스로 비행기를 몰고 연기에 나섰습니다. 그러다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부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1930년 이 영화는 개봉되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비행기를 타본 사람이 드문 시대에 하늘에서 전투를 벌이는 장면에 관객들은 환호했습니다. 엄청난 제작비가 들어갔지만 그때까지의 흥행기록을 깨뜨린 800만 달러를 벌어들였습니다. 휴즈는 영화산업에 뛰어든 뒤 할리우드를 주름잡은 여배우들을 줄줄이 발굴했습니다. 또 여러 유명 여배우들이 그의 연인으로 있다가 떠났습니다.

휴즈는 1957년 영화에서 완전히 손을 털고 항공산업에 도전했습니다. 최고 속도로 비행하는 항공기를 개발하기 위해 그는 우수한 엔지니어를 영입했습니다. 그 결과 H-1 레이서가 나왔습니다. 휴즈는 1935년 9월 자신이 직접 이 항공기를 몰고 시속 563km라는 당시로써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비행기록을 수립했습니다. 이어 같은 비행기를 몰고 북미대륙 횡단에 성공했습니다. 1938년 7월에는 자신이 세운 휴즈항공사에서 록히드 L-14 수퍼 엘렉트라를 개조해 91시간 만에 세계를 일주하는 비행에도 성공했습니다. 이로써 휴즈는 고속 항공기 시대를 여는 초석을 놓았습니다. 휴즈는 트랜스월드 항공과 에어웨스트 항공사를 사들여 휴즈 에어웨스트라는 항공사를 시작했습니다.

휴즈는 방위 산업에도 뛰어들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휴즈는 군 당국으로부터 고고도 고속 정찰기를 개발해 달라는 주문을 받았습니다. 휴즈는 정찰기 XF-11을 개발해 1946년 7월 직접 시험 비행했습니다. 그러나 프로펠러 고장으로 정찰기는 고급 주택가에 추락했습니다. 휴즈는 중상을 입고, XF-11. 1호기는 완파됐습니다.

초대형 수송기 H-4 허큘리스.
초대형 수송기 H-4 허큘리스.

휴즈는 또 유럽 전선으로 군수물자를 수송하기 위한 초대형 수송기 H-4 허큘리스를 제작했습니다. 1943년 5월 17일, 휴즈는 물 위에서 뜨고 내리는 거대 수송기의 이착륙을 시험하기 위해 시코르스키 S-43이라는 항공기를 몰았습니다. 그러나 이 항공기는 네바다주에서 추락했습니다. 이 사고로 같이 타고 있던 그의 직원 한 명과 항공기 검사관이 숨졌습니다. 휴즈는 머리에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만들어진 H-4 수송기는 나무로 제작한 것으로, 날개 길이가 97m가 넘는 세계 최대의 항공기였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이 항공기는 역사상 가장 날개폭이 긴 항공기라는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휴즈는 이 항공기도 직접 몰고 물에서 떠 오르는 시운전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거대 비행기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완성되지 못했고 지금은 박물관에 전시돼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휴즈 항공사는 헬리콥터 개발에 도전했습니다. 휴즈는 시코르스키 항공사와 함께 헬리콥터의 역사를 새롭게 썼습니다. 휴즈는 공격용 헬기, 공대공 미사일 등 다양한 무기체계를 개발해 미군에 납품했습니다.

휴즈는 부동산 부자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벌어들인 많은 돈은 부동산에 투자됐습니다. 예를 들면 휴즈 항공사 땅으로 1200ac, 미사일 생산기지에 4천 4백여ac , 유흥 도시 라스베이거스에 2만 5천ac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라스베이거스 중심지에 있는 대형 호텔도 5개나 구입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휴즈를 라스베이거스 남작이라고 불렀습니다.

여러 차례 항공기 사고를 겪은 이후부터 휴즈는 세상으로부터 차츰 고립된 채 기이한 행태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대인 기피증이 극심했습니다. 휴즈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1960년대부터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호텔의 꼭대기 층에서 모든 업무를 처리했습니다. 필요한 결재 서류나 사업 보고서 등은 긴 막대기에 바구니를 달아 창문으로 올려보내야 했습니다.

세균이 무서워서 물건을 맨손으로 만지지 못해 엄청난 양의 부드러운 티슈와 소독한 수건을 썼습니다. 라스베이거스에서도 사람의 눈에 뜨이게 되자 휴즈는 1960년대 후반 외국으로 나가 니카라과, 바하마, 멕시코 등으로 옮겨 다녔습니다. 세간에서는 그의 활동을 둘러싼 각종 소문과 억측이 난무했습니다. 그는 심각한 강박관념에 싸여 있다고도 하고, 마약에 관련됐다고도 했습니다.

휴즈는 1976년 4월 5일 멕시코에 있는 그의 고급 호텔에서 몸 상태가 악화되자 급히 비행기로 텍사스 휴스턴에 있는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휴즈는 향년 70세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머리카락, 수염, 손톱, 발톱은 매우 길었고, 키는 큰 데 반해 몸무게는 41kg였습니다. 부검을 통해 사망 요인은 신부전증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그의 시신은 고향인 텍사스주 글렌우드 묘지에 묻혔습니다.

휴즈는 세상을 떠날 때 15억 달러의 재산을 남겼습니다. 오늘날의 가치로는 약 66억 달러에 달합니다. 그의 말년은 은둔과 기행으로 가득 찼지만 기부에는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하워드 휴즈 의학연구소를 세우고 재산을 기부해 의학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연구소는 현재 자산이 182억 달러로 세계 2위 규모의 생의학 연구소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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