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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당파를 초월한 소신의 정치인, 존 매케인


최근 타계한 존 매케인 미국 상원의원.
최근 타계한 존 매케인 미국 상원의원.

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들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미국의 전쟁 영웅이자 당파를 초월한 소신의 정치로 존경 받았고, 최근 세상을 떠난 존 매케인 상원의원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인물 아메리카 오디오] 당파를 초월한 소신의 정치인, 존 매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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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5일 미국의 전쟁 영웅이자 공화당 대통령 후보이기도 했던 매케인 상원의원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뇌종양 판정을 받은 지 1년여 만에 그가 타계하자 전 미국은 그를 추모했습니다. 전국에는 반기가 게양됐고 매케인 의원의 고향인 애리조나주 주민들은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뙤약볕에도 장시간 줄을 서 그를 조문했습니다. 이어 그의 시신은 자신이 봉직했던 연방 의사당 중앙 홀로 옮겨져 수 많은 사람들의 조문을 받았습니다.

9월 1일에는 워싱턴 국립대성당에서 조지 부시, 바락 오바마 전 대통령을 비롯한 수많은 정치인과 가족 친지들이 모인 가운데 장례식이 거행됐습니다. 과거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대결했던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추도사에서 “전에는 매케인 때문에 좌절하기도 했다, 그도 나한테 같은 말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덕에 나는 발전할 수 있었다”며 그를 칭송했습니다.

매케인 상원의원은 공화당 소속이었지만 당리당략에만 얽매이지 않고 국가와 국민을 위한 최선의 길이라면 과감하게 그 길을 택하는 독자노선을 걸어온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당 소속 인사들은 물론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반대당의 정치인들도 매케인 의원을 존경했습니다.

존 매케인 의원은 1936년 8월 29일 전통적인 무인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잭 매케인은 해군 제독으로 태평양 사령관을 지냈고, 할아버지 존 S. 슬루 매케인 또한 해군 제독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태평양 함대에 복무했습니다. 매케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미국 해군 사상 최초의 4성 장군 부자였습니다. 존 매케인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가 소위로 임관됐습니다. 그런 다음 다시 비행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해군 전투기 조종사가 됐습니다.

매케인은 1967년 10월 26일 하노이 공장지대를 폭격하는 임무를 띠고 A-4 스카이호크를 타고 출격했습니다. 작전 도중 그는 소련제 지대공 미사일을 맞아 추락했습니다. 두 팔이 부러지고 다리에는 총상을 입은 그는 하노이 근처 호수에 떨어져 포로가 됐습니다. 매케인은 수용 중 집중적인 심문과 구타와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가 포로 생활을 하던 1968년 7월에 아버지 "잭" 매케인 제독이 태평양 사령관으로 부임했습니다. 그러자 어느날 북베트남은 매케인에게 일찍 석방해 주겠다는 제의를 했습니다. 선전에 이용하려는 전략이었습니다. 그러나 매케인은 "먼저 들어온 사람이 먼저 나간다."는 군인의 수칙대로 나보다 먼저 잡힌 포로들이 모두 석방될 때까지 나가지 않겠다며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그에게 전쟁 영웅이라는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 1973년 3월 베트남에서 석방된 후 하노이 공항에 도착한 존 매케인.
지난 1973년 3월 베트남에서 석방된 후 하노이 공항에 도착한 존 매케인.

매케인은 1973년 파리평화조약이 체결된 뒤에야 5년 반 동안의 긴 포로생활을 끝내고 석방됐습니다. 매케인은 그때의 고문으로 팔을 머리 위로 올릴 수 없는 후유증을 안고 돌아왔습니다. 필리핀 클라크공군기지에 귀환하는 매케인의 모습은 뉴욕타임스 신문에 실리기도 했고 백악관에서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목발을 짚은 채로 악수하는 장면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줬습니다. 이런 일들로 매케인은 전국적으로 유명인사가 됐습니다.

매케인은 20여 년간 복무했던 군에서 제대를 한 뒤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정착했습니다. 매케인은 지역구의 연방 하원의원이 은퇴하게 되자 1982년 공화당 후보로 출마했습니다. 이 선거에서 승리해 매케인은 처음으로 워싱턴의 미국 연방 의회에 진출했습니다. 이어 1984년에 한 차례 더 하원의원으로 당선이 됩니다.

당시 애리조나주 상원의원으로는 미국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꼽히고, 대통령 후보에까지 올랐던 배리 골드워터 의원이 있었습니다. 골드워터 의원이 은퇴하자 그 뒤를 이어 매케인이 출마를 했고, 1986년 상원의원에 당선됐습니다. 이후 6선에 연이어 성공해 상원 상무위원회, 인디언문제위원회, 군사 위원회 등에서 위원장직을 맡으면서 많은 업적을 쌓았습니다.

매케인 의원은 베트남 전 포로로 혹독한 시련을 겪었지만, 베트남과의 관계 정상화를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매케인 의원은 민주당 의원들과 함께 베트남 전 실종자 수색, 관계 정상화 운동을 벌였습니다. '이제는 상처를 치유할 때다. 그것이 전쟁을 끝내는 방법이며 계속 살아가야 할 시기이다.'라는 게 그의 신조였습니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로 1995년 빌 클린턴 대통령 때 미국과 베트남의 외교정상화가 이루어졌습니다. 매케인 의원이 세상을 떠나자 베트남 정부는 그가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베트남 미국의 동반자 관계 촉진을 주도했다며, 즉각 조의를 표했습니다.

매케인은 대권에도 두 번 도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2000년에는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지만, 조지 W. 부시 후보에 밀려 선거전을 포기했습니다. 2008년에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획득해 민주당의 바락 오바마 후보와 격돌했습니다. 치열한 선거운동을 벌이는 중에도 매케인 후보는 지지자들에게 상대방 후보에 대한 인신공격적 태도를 삼갈 것을 당부하는 최고의 덕목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느 날 한 지지자가 민주당 오바마 후보의 혈통을 문제 삼으며 비난하자 당시 매케인 후보는 그 지지자에게 “나도 대통령이 되고 싶습니다.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그는 훌륭한 사람이고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달랬습니다.

그러나 미국을 휩쓴 개혁의 열풍 속에 매케인은 다시 한번 대통령의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매케인 후보는 패배를 인정하는 연설에서 지지자들에게 진정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면 누가 대통령이 돼도 협조하라고 거듭 당부했습니다.

바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일 워싱턴 국립대성당에서 엄수된 고 존 매케인 의원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했다.
바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일 워싱턴 국립대성당에서 엄수된 고 존 매케인 의원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했다.

2017년 7월, 미국 상원에서는 표결을 위해 입장하는 원로 의원에게 여야 의원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박수를 보냈습니다. 뇌 수술을 받은 지 2주도 안 돼 존 매케인 의원이 애리조나에서 워싱턴까지 3천Km를 날아온 것입니다. 그리고는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인 오바마케어 폐기를 위한 트럼프 대통령 안에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결국 오바마케어 폐지법안은 부결됐고 같은 당인 트럼프 대통령에게 큰 패배를 안겨주었습니다.

이처럼 매케인 의원은 공화당 소속이었지만, 당과 다른 소신을 밝히는 데도 거침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공화당 내에서 독불장군이나 이단아란 뜻의 ‘매버릭(maverick)’으로 불렸습니다.

존 매케인 의원은 세상을 하직하면서도 화합을 촉구했습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당이 다르고 경쟁 상대였음에도 오바마 전 대통령에게 장례식 조사를 부탁했습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허풍과 모욕, 가짜 논란이 난무하는 현 미국 정치에서 매케인은 우리에게 더 큰 사람이 되라고 충고했다고 말했습니다.

자기 자신의 이익보다 대의를 위해 봉사하는 것만큼 더 귀한 것은 없다고 말하는 존 매케인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한 정치인으로 미국인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아있을 것입니다.

VOA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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