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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재즈 음악 대사, 윌리스 코노버


지난 1959년 윌리스 코노버가 VOA 스튜디오에서 ‘재즈아워(Jazz Hour)’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들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자유의 음악을 세계로’ 재즈 음악 대사, 윌리스 코노버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인물 아메리카 오디오] 재즈 음악 대사, 윌리스 코노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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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시대 국제적으로 가장 인기 있었던 방송 프로그램의 하나는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에서 방송한 ‘재즈아워(Jazz Hour)’였습니다. 이 프로를 제작하고 진행한 방송인은 굵고 깊은 바리톤의 목소리를 가진 윌리스 코노버(Willis Conover)였습니다. 코노버가 들려주는 재즈 음악은 VOA 방송을 타고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코노버는 가수나 작곡가는 아니었지만, 역사상 어떤 사람보다도 재즈를 세계에 널리 퍼지게 한 인물입니다. 1955년부터 40여 년간 계속된 코노버의 방송으로 인해 재즈 음악은 국제적인 언어로 떠올랐습니다. 윌리스 코노버의 Jazz Hour를 들은 청취자 수는 세계적으로 1억 명이 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코노버를 재즈의 대사로 부르기도 합니다.

윌리스 코노버는 1920년 미국 동북부 뉴욕주의 버팔로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코노버는 고등학교 다닐 때 학교 연극행사에서 방송 아나운서의 역할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발음이나 목소리가 좋아 사람들이 코노버에게 “진짜 아나운서 같다”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라디오 방송으로 중계되는 단어 암기대회에 출전한 적도 있었는데, 그때 진짜 아나운서가 코노버에게 방송계에서 일을 해보라고 조언을 했습니다.

그 후 코노버는 메릴랜드주에 있는 조그마한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그는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방송국에서 일한 경험이 있어 코노버는 전선으로 가는 대신 군 기지에서 신병들의 면접관으로 복무를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다시 여러 상업 방송국에서 일했습니다.

1940년대 워싱턴 D.C.는 재즈의 중심도시였습니다. 자연히 코노버는 많은 재즈 음악을 들을 기회가 있었고 워싱턴과 뉴욕의 여러 재즈 음악인들도 알게 됐습니다. 재즈 콘서트의 사회도 자주 보고 음악회를 직접 주관하기도 했습니다. 또 그는 어떤 인종이든 가리지 않고 참석해 함께 즐기는 음악회를 자주 열어 인종 차별을 없애는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코노버는 방송에서 좀 더 많은 재즈를 틀기 원했지만 상업방송에서는 제약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중 VOA에서 재즈 프로그램을 시작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해 1955년부터 VOA 재즈 프로를 맡게 됐습니다. 당시는 동서 진영의 냉전이 심한 때였습니다. 미국과 소련이 극도로 대립을 하던 1960년대와 70년대에 소련과 동유럽에서는 VOA를 청취하는 일이 엄격히 금지돼 있었습니다. 이들 나라는 재즈 음악이 위험하고 반체제적이라고 간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노버의 재즈 프로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애청자들 중 여러 사람이 나중에 재즈 음악가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 코노버의 프로는 영어를 천천히 말하는 ‘스페셜잉글리시(Special English)’ 서비스를 통해 주로 방송됐기 때문에 많은 동유럽 사람들은 이 프로를 통해 영어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코노버는 재즈를 들려줄 뿐 아니라 빌리 할리데이(Billy Holiday),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등 많은 유명인과 인터뷰도 했습니다. 루이 암스트롱은 VOA 스튜디오에서 VOA의 방송국 ID를 직접 해주기도 했습니다. 코노버는 암스트롱의 모스코바 공연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소련은 미국 문화를 극히 경계하던 때여서 그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코노버는 재즈를 살아 있는 음악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재즈는 문화적 유산과 기억, 감정에 뿌리를 둔 음악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렇게 유명한 방송인이지만 미국인들 중에는 아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VOA가 본래 미국 국내용으로 방송을 하는 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는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지난 1959년 폴란드 공항에서 윌리스 코노버(가운데)를 팬들이 맞이하고 있다.
지난 1959년 폴란드 공항에서 윌리스 코노버(가운데)를 팬들이 맞이하고 있다.

​1959년 코노버가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는 공항에 수백 명의 팬이 몰려들어 그를 환영했습니다. 사람들은 카메라와 꽃을 들고나와 떠나갈 듯 환호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코노버는 다른 어떤 유명인사가 오나 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대형 현수막에 '미스터 코노버, 폴란드 방문을 환영합니다' 라고 쓴 문구를 보고서야 그 인파가 자신을 환영하는 사람들인 줄 알았습니다.

코노버는 미국에서도 여러 재즈 축제와 음악회에 나가 아나운서로 활약하는 등 재즈의 전파를 위해 많은 애를 썼습니다. 이곳 워싱턴 D.C.에 있는 공연장 케네디센터에서 열린 음악회에 출연한 것만도 30회가 넘습니다. 1969년 백악관에서 열린 듀크 엘링턴 70세 기념 공연도 코노버가 기획하고 사회를 본 것이었습니다.

코노버가 특히 좋아하는 재즈 음악인은 듀크 웰링턴 같은 연주가였습니다. 코노버는 언젠가 루이 암스트롱은 재즈의 심장이고 듀크 엘링턴은 재즈의 영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코노버가 좋아하는 음악인들 중에는 색소폰 연주가인 벤 웹스터(Ben Webster)도 있었습니다.

윌리스 코노버는 오랜 암 투병 끝에 1996년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윌리스 코노버는 워싱턴 근교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됐습니다. 뉴욕타임스는 1996년 5월 19일 자에서 그가 세상을 떠난 소식을 전하면서 그의 음악 방송은 B-29 폭격기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찬양했습니다. 버클리 음악대학은 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습니다.

워싱턴 근교에 있는 국립문서보관소는 방대한 양의 코노버 방송 프로그램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또 노스텍사스대학(University of North Texas)은 그의 기념관을 설치하고 일반인들이 온라인으로 그가 기증한 각종 음반들을 열람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코노버는 떠났지만, 오랫동안 일했던 이곳 VOA 복도에는 아직도 그의 초상화가 걸려 있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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