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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미국 서부 진출의 길을 연 메리웨더 루이스와 윌리엄 클라크 (2)


메리웨더 루이스와 윌리엄 클라크가 탐험 후 만든 지도.
메리웨더 루이스와 윌리엄 클라크가 탐험 후 만든 지도.

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들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미국 서부 진출의 길을 연 메리웨더 루이스와 윌리엄 클라크의 두 번째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인물 아메리카 오디오] 미국 서부 진출의 길을 연 메리웨더 루이스와 윌리엄 클라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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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 사냥꾼들이 가본 미국 본토의 가장 서북쪽 변방 맨단에서 겨울을 보낸 탐사대는 1805년 미주리강 얼음이 녹자 다시 탐사 길에 나섰습니다. 4월 7일 출발한 이들은 이제 거의 정 서 방향, 오늘날의 노스다코타주에서 몬태나주로 전진했습니다. 그 동안 모은 자료를 제출하기 위해 일부는 세인트루이스로 가고, 남은 일행은 33명이었습니다.

탐사대는 옐로스톤강, 머라이어스강을 지나서 6월 13일 미주리강을 가르는 대폭포(Great Falls)에 이르렀습니다. 일행은 장엄한 자연의 모습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몬태나주의 북부에 위치한 이 폭포는 강의 약 16Km 구간에 다섯 개의 폭포가 연달아 이어져 있었습니다. 가장 높은 것은 25m에 달했고 다섯 개 모두의 낙폭을 합치면 57m나 됐습니다.

탐사대는 이들 폭포 때문에 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폭포를 우회해 짐을 운반해야 했고, 지형이 험해 이곳을 지나는 데만 한 달이 걸렸습니다.

드디어 탐사대는 대륙 분리선(Continental Divide)으로 불리는 로키산맥의 레미고개(Lemhi Pass)에 이르렀습니다. 이 고개를 넘으면 태평양 쪽으로 접어들게 됩니다. 낮은 곳을 택한 고개라고 해도 높이는 해발 2천247m에 달했습니다. 여기는 길고 긴 미주리강의 발원지이기도 했습니다.

탐사대가 찾는 것은 태평양 쪽으로 연결되는 물줄기였지만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높이 솟은 로키산맥의 눈 덮인 산봉우리만 첩첩이 앞을 가로막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로키산맥은 캐나다에서부터 미국, 멕시코까지 남북으로 이어지는 대 산맥으로 그 길이는 약 4천800여 Km에 달합니다. 서울과 베이징 직선거리의 다섯 배가 넘는 길이입니다. 이 산맥에서 가장 높은 곳은 콜로라도 주의 마운트엘버트(Mount Elbert)로 해발 4천401m입니다. 당시 미 대륙은 이처럼 높은 산맥이 가로놓여 있어 동서를 잇는 길이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태평양 쪽으로 가야 하는 탐사대로서는 막막할 뿐이었습니다.

탐사대는 이 험한 산간지대를 안내해 줄 원주민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맨단을 떠난 지 5개월 동안 단 한 명의 인디언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지형으로 보아 자신의 출신 부족인 쇼손족이 부근에 살고 있을 것이라는 사카가웨아의 말을 듣고 루이스는 선발대를 조직해 인디언을 찾아 나섰습니다.

얼마 후 탐사대는 기적처럼 사카가웨아의 부족인 쇼손족 일행을 만났습니다. 더욱 놀란 것은 그들 부족의 추장 중 한 사람이 바로 사카가웨아의 오빠였다는 사실입니다. 탐사대는 8월 30일, 이들로부터 구입한 말을 타고 쇼손족 가이드를 따라 로키산맥을 넘기 시작했습니다.

탐사대는 45일 동안 640여 Km를 통과해 태평양으로 흐르는 수로 컬럼비아강에 이르렀습니다. 탐사대는 강폭이 좁고 물살이 급한 컬럼비아강을 타고 내려가 드디어 1805년 12월 3일 태평양에 이르렀습니다. 세인트루이스의 캠프뒤보아를 떠난 지 573일, 6천550여 Km에 이르는 긴 여정이었습니다.

이곳에서 겨울을 나기로 한 탐사대는 12월 7일 컬럼비아강 남쪽 오늘날의 오리건주에 기지를 세우고 포트클랫솝(Fort Clatsop)이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안개가 잦은 데다 비가 많이 내리고 사냥감이 별로 없는 태평양 연안에서 월동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약 4개월 동안 각종 조사를 실시하고 돌아가는 여정을 준비했습니다.

이듬해 3월 23일, 눈이 녹자 탐사대는 세인트루이스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습니다. 한번 왔던 길이라 돌아가는 여정은 훨씬 빨랐습니다. 태평양까지 가는 데는 19개월이 넘게 걸렸지만 돌아가는 시간은 6개월에 불과했습니다. 탐사대는 그냥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7월 3일부터는 루이스가 북쪽, 클라크가 남쪽의 새로운 귀로를 개척하면서 동쪽으로 향했습니다. 한 달여 만에 이들은 미주리강 부근에서 다시 합류한 후 맨단을 거쳐 1806년 9월 23일 세인트루이스에 도착했습니다. 처음 출발했을 때의 대원 중 단 한 사람만이 맹장염으로 숨졌을 뿐 전원 살아 돌아왔습니다. 세인트루이스 시민들은 선창에 도열해 탐사대를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토머스 제퍼슨 당시 대통령은 이들을 백악관으로 불러 성대한 축하연을 베풀었습니다. 또 루이스를 루이지애나 준주의 지사로 임명하고 광대한 땅도 하사했습니다. 클라크도 루이스의 뒤를 이어 루이지애나 준주 지사에다 인디언 문제 감독관으로 임명됐습니다.

이들의 탐사는 미국이 로키산맥 너머 오리건 지역까지 영유권을 주장하는 유력한 근거가 돼 미국의 영토 확장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또한 이들의 탐사는 미시시피강 너머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서부 개척의 길을 닦아 놓았습니다.

오늘날 이들이 다녀온 길에는 루이스와 클라크라는 이름의 산과 강, 공원, 학교, 박물관 등이 많이 있습니다. 또 곳곳에서는 그때를 재연하는 행사도 자주 열려 이들이 이룩한 업적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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