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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20세기 미국 문학의 거봉' 어니스트 헤밍웨이 (1)


‘노인과 바다’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그의 아내 폴린 헤밍웨이가 지난 1927년 프랑스 파리에서 찍은 사진.

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각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소개해드리는 '인물 아메리카'입니다. 오늘은 20세기 미국 문학의 거봉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소개합니다.

[인물 아메리카 오디오] '20세기 미국 문학의 거봉' 어니스트 헤밍웨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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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미국 문학 최고봉의 한 사람으로 추앙을 받는 어니스트 헤밍웨이는자신의 작품 속 주인공들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작가였습니다.그는 여러 번의 결혼과 이혼, 전쟁 중 부상, 비행기 추락사고, 자살로 알려진 종말까지 남들은 평생을 걸쳐 겪어보지 못할 일들을 겪었습니다.

‘노인과 바다’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헤밍웨이는 1899년 중부 대평원 지대인 일리노이 주 오크 팍에서 태어났습니다. 6명의 가족 중 그는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의사였고 어머니는 화가이면서 피아노 연주자였습니다.
오크 팍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어니스트는 학교 신문에 글을 썼습니다. 당시 유명한 스포츠 기자 링 랜더의 글이 좋아 자신도 그렇게 쓰려고 애를 썼고, 그러면서 점차 글 쓰는 재능을 키웠습니다.

헤밍웨이 가족은 여름이 되면 미시간 주에 있는 별장에 가서 지내다 오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어니스트에게 낚시, 사냥, 텐트 치는 방법, 불을 피워 요리를 하는 방법 등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나중에 그의 작품 세계에 반영이 됐습니다.

세계 제 1차 대전이 벌어지고미국이 막 참전을 하던1917년,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대학을 가지 않고 대신 군대에 지원을 했습니다. 그러나 시력이 나빴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헤밍웨이는 미조리 주 캔사스 시티에 있는 캔사스 시티 스타 신문사에 기자로 들어갔습니다. 헤밍웨이는 병원, 경찰서 열차 정거장 등을 돌며 취재를 했습니다. 당시 신문사는 헤밍웨이의 문장 형식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캔사스 시티 스타는 기자들에게 문장을 짧게 쓰라고 요구했습니다. 헤밍웨이는 재빨리 이런 형식을 익히도록 애를 썼습니다.

헤밍웨이는 9개월만에 신문사를 그만두고 1918년 적십자사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유럽 전쟁터에서 부상병을 실어 나르는 트럭 운전사 일을 하게 됐습니다. 헤밍웨이는 이탈리아에 배치됐습니다. 헤밍웨이는 자신이 위기에 처해있을 때 어떻게 행동하게 되는지를 스스로 알아보기 위해 가능한 한 최 전선까지 들어가는 모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폭탄이 터져 200개의 파편이 다리에 박히는 중상을 입고밀라노 육군병원에서 6개월 동안 입원치료를 받았습니다.

헤밍웨이는 전쟁이 끝난 다음 캐나다의 토론토 스타 신문 기자로 들어갔습니다. 신문사에서는 헤밍웨이가 쓴 시카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했고 보수도 괜찮게 주었습니다.

헤밍웨이는 시카고에서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는 최초의 작가로 알려진 셔우드 앤더슨을 알게 됐습니다. 헤밍웨이는 앤더슨의 글이 정말로 사실적이라고 느꼈고 자신도 그렇게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앤더슨은 헤밍웨이에게 글 쓰는 데 도움이 되는 조언을 많이 해주었습니다. 앤더슨은 또 프랑스 파리로 가보라고 권했습니다. 파리는 생활비도 싸고 세계 여러 곳에서 수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와 있다는 것입니다.

헤밍웨이는 해들리 리차드라는 여인과 결혼을 하고 1921년 부인과함께 파리로 갔습니다. 도착한 파리는 춥고 칙칙했습니다. 이들은 파리에서도 가장 가난한 동네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방은 좁고 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파리 생활을 즐거워했습니다. 헤밍웨이는 파리가 어떤 곳인가를 깊이 들여다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면서, 프랑스 풍습과 스포츠를 즐겼습니다. 새로운 친구들 중에는 1920년대에 파리로 온 예술가, 작가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시인 에즈라 파운드, 전위작가 거트루드 스타인, 작가 스코트 핏취제랄드 등이 있었습니다.

헤밍웨이는 유럽 여러 곳을 돌며 정치, 평화회의, 국경분쟁 등 여러 가지 기사를 썼습니다. 각종 스포츠, 스키, 낚시 등에 관한 이야기도 썼습니다.

헤밍웨이가 내 놓은 최초의 소설집은 "In Our Time." 우리들의 시대에’ 였습니다. 여기에서 큰 관심을 끈 작품은 "Big Two-Hearted River,"‘두 개의 심장을 가진 큰 강’이라는 이야기로,미시간 주로 낚시 여행을 떠난 한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과거와 전쟁을 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그런 말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즉 작가가 그렇게 설명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젊은이가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독자는 스스로 그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이 단편은 미국 최고의 현대소설 중 하나로 꼽히고 있기 때문에, 최우수 작품집 같은데 흔히 끼는 소설입니다.

헤밍웨이는 장편을 써서 자신이 진지한 작가라는 걸 세상에 알리고 싶었고 또 돈도 벌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The Sun Also Rises." ‘태양은 다시 떠 오른다’ 였습니다. 이 장편은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럽에 사는 미국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것입니다.전쟁은 젊은이들의 꿈을 파괴했고, 그 꿈을 대신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그래서 작가 거트루드는 그런 사람들을 "The Lost Generation잃어버린 세대’라고 불렀습니다.

헤밍웨이의 이 소설은 즉각 대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리고 영화로도 만들어져 흥행에도 성공했습니다.

불과 25살의 나이에 헤밍웨이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가 됐습니다.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헤밍웨이의 소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문장은 캔사스 시티 스타 기자 때 배운대로 짧았고 설명이 없었습니다.헤밍웨이는 새로운 것을 가미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본 것, 느낀 것을 표현하는 단어에 색갈을 입혔습니다. 후기에 쓴 작품들에는 때로 어색한 표현들이 있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언어를 사용했을 때는 완벽에 가까웠습니다.

‘태양은 다시 떠 오른다’가 성공을 한 뒤 그는 파리에서 더 유명해졌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러 왔습니다. 그런 인기는 그의 결혼생활에도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찾아온 사람들 중에는 여성잡지 보그의 편집인 폴린 파이퍼도 있었습니다. 헤밍웨이를 만나면서 이 여성은 헤밍웨이 부인 해들리와 친구가 됐습니다. 그러나 폴린은 헤밍웨이와 사랑에 빠지고 두 사람은 몰래 만나곤 했습니다.

그래도 부인 해들리에 대한 애정이 식은 건 아니었습니다. 언젠가 헤밍웨이는 폴린과 짧은 여행을 다녀온 뒤의 느낌을 이렇게 썼습니다.

‘해들리를 다시 보았다. 그녀 말고 다른 여인을 사랑해야 했다면 나는 죽었어야 했다. 그녀는 웃고 있었고태양은 그녀의 사랑스런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헤밍웨이가 이처럼 아내를 사랑했지만 그 결혼은 결국 파탄이 나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은 별거에 들어갔고 아들은 해들리가 맡아 길렀습니다. 헤밍웨이는 나중에 자기 일생에 해들리와 함께 살던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회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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