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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미용분야 거대 다국적기업 창업자, 메리 케이 애쉬


전세계 40개 나라에 350만 명이 넘는 미용 상담사들을 두고 있고 다국적 기업 '메리 케이 코스매틱스'를 창업한 메리 케이 애쉬. 사진 출처 = 메리 케이 애쉬 재단 웹사이트. 

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각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소개해드리는 '인물 아메리카'입니다. 오늘은 미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여성 사업가중의 한 사람 메리 케이 애쉬를 소개합니다.

미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여성 사업가중의 한 사람 메리 케이 애쉬. 오늘날 미국은 물론 한국, 중국, 인도, 아르헨티나, 카자흐스탄 등 거의 40개 나라에 350만 명이 넘는 미용 상담사들이 활동하고 있는 메리 케이 코스매틱스. 바로 이 거대한 국제 기업을 창업한 여성이 바로 메리 케이 애쉬입니다.

기업계 매체인 ‘Direct Selling News’에 따르면, 메리 케이 화장품 회사는 2015년 기준 세계에서 6번째로 큰 다단계 마케팅 회사입니다. 2015년 판매고는 37억 달러. 이는 각 판매원, 즉 미용 상담사들이 가져간 제품의 도매 가격입니다. 이들이 소비자들에게 소매 가격으로 판 총 금액은 이보다 훨씬 많습니다.

메리 캐슬린 왜그너, 약칭 메리 케이는 1918년 미국 남부 텍사스 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매리 케이는 대부분 시간 병든 아버지를 돌보았고, 어머니는 식당에서 일을 해야 했습니다. 메리 케이는 17살 때 벤 로저스라는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남편 로저스가 2차 대전에 참전할 때까지 이들 사이에는 3명의 자녀가 태어났습니다. 로저스가 전쟁에서 돌아온 다음 부부는 결별했습니다. 메리 케이는 아이들을 보살피기 위해 일을 나가야 했습니다. 3명의 아이들까지 길러야 했던 메리 케이는 처음 가정집이나 사무실들을 돌면서 책 외판원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청소에 쓰는 물 비누라든가 청소 도구를 팔았습니다.

어느 날 저녁 메리 케이는 물건을 팔기 위해 오바 히쓰 스푼모어(Ova Heath Spoonemore)라는 사람의 집을 방문하게 됐습니다. 그날 저녁 스푼모어 부인은 찾아온 친구들에게 집에서 만든 화장품을 나누어 주고 있었습니다. 그 화장품은 아칸소 주에 사는 스푼모어의 아버지 J.W. 히쓰가 만든 것이었습니다. 메리 케이도 그 화장품을 써 보았는데, 피부가 무척 부드러워졌습니다. 메리 케이는 바로 이때 사업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사람들을 모아놓고, 시범을 보이면 물건이 잘 팔리겠구나 하는 아이디어였습니다.

메리 케이는 1963년에 5천 달러를 가지고 텍사스 주 댈러스에서 ‘메리 케이 코스매틱스’라는 회사를 차리고 화장품 판매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나이가 벌써 중년으로 접어든 45세 때였습니다. 새로 차린 회사에서는 큰아들 리처드가 재무를 맡았습니다. 사업 방식은 가정집이나 사무실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피부미용 시범을 보여주고 물건을 파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판매원은 9명이 있었습니다.

메리 케이는 다단계 판매 방식을 도입했습니다. 이들 판매원, 또는 미용 상담사들은 회사로부터 월급을 받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회사로부터 비누라든가 피부 미용제 등을 구입한 다음 돈을 더 붙여 가족, 친구, 그리고 일반 소비자들에게 팔았습니다. 메리 케이는 상담사들이 새로운 상담사를 끌어들이면 기존의 상담사에게 신입 판매원이 올린 매상의 일부를 보상금으로 떼어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상담사는 자신이 물건을 소매로 팔아 이익을 남기기도 하지만, 다른 판매원을 계속 끌어들임으로써 회사로부터 더 많은 보상금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새로 들어온 상담사는 또 다음 사람을 끌어들여 수입을 늘립니다. 이렇게 하면 마치 피라미드처럼 아래로 내려갈수록 조직망이 점점 커지고 그렇게 새끼를 많이 친 사람은 큰 돈을 벌 수가 있게 돕니다. 그런 사람이 많아질수록 본사인 ‘메리 케이 코스매틱스’ 수입도 더욱 늘어납니다.

사업 시작 불과 2년 후인 1965년 메리 케이 사의 매상은 100만 달러를 육박했습니다. 메리 케이는 가입자들에게 여성이란 빨리 늙어 가면서 그만큼 돈도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집안도 꾸려가고 돈도 벌려면 이런 사업을 하라고 적극적으로 권장했습니다.

메리 케이는 경쟁은 좋은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단 누구나 승리할 수 있는 경쟁을 하도록 애를 썼습니다. 이기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는 일이 없도록 조직을 운영해 나갔습니다. 즉 남과의 비교보다는 자신과의 경쟁, 나 자신의 실적이 지난해보다 이번 해에는 좀 더 나아지도록 노력하는 그런 제도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긴 판매원들에게는 상도 푸짐하게 주었습니다.

낮은 단계의 우승자에게는 성공의 사다리라는 이름의 금으로 된 핀을 상으로 줍니다. 그 다음 단계의 상은 보석입니다. 보석의 종류는 실적이 높아질수록 고급으로 올라갑니다. 최고는 다이아몬드입니다.

메리 케이 사는 드디어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피부 미용제 다단계 회사가 됐고, 그러면서 얼굴은 물론, 몸, 머리, 손톱 등의 미용에 관한 여러 가지 제품도 개발했습니다.

메리 케이 화장품은 1965년 이후 매해 텍사스 주 댈러스에서 가입한 상담원 대회를 열고 있습니다. 처음 모임은 커다란 사무실 같은 데서 열렸습니다. 약 200명이 참석했는데 매리 케이는 직접 음식을 만들어 판매원들에게 담아주었습니다. 이제는 4만여 명이 모이는 대형 행사가 되고 있습니다.

그 해 가장 많은 실적을 올린 판매원에게 표창도 하고 유명 연예인들이 출연하는 공연도 있습니다. 우수 판매원에게 주는 상품은 휴가여행, 보석, 밍크 코트, 그리고 유명한 상품 핑크색 캐딜락 자동차가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핑크색 벤츠, 타이완에서는 핑크색 도요타입니다. 상이 핑크색인 것은 메리 케이 포장이 핑크색으로 돼 있기 때문입니다.

상담사들과 회사 직원들은 이런 기회를 통해 교육도 받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메리 케이는 회사의 매상을 올리려면 어떤 것이 일을 잘 하는 것인가를 인식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었습니다.

메리 케이는 기독교 신앙심이 깊었습니다. 늘 판매원들에게 하느님을 먼저 생각하고 그 다음 가정, 그 다음 사업을 생각하라고 말했습니다. 메리 케이는 또 여성들은 좋은 어머니, 좋은 아내가 되는 길을 추구하면서 일에도 성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메리 케이는 암 퇴치를 위한 지원에도 적극 나섰습니다. 세 번째 남편 멜 애쉬가 1980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매리 케이는 암 퇴치를 위한 지원 운동에 나섰습니다. 비영리 기구인 메리 케이 애쉬 자선 재단을 창설해 여성 암 연구에 지원을 했습니다. 2001년 메리 케이 화장품 사와 자선재단은 여성 폭력 방지 사업도 시작했습니다.

메리 케이 애쉬는 여러 가지 기업가 상도 받았습니다. 1985년에는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 여성 25명 가운데 한 명으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1996년에는 전국 기업가 명예의 전당에 등재됐습니다. 그런데 책도 써서 큰 인기를 모았습니다. 메리 케이 애쉬는 세 권의 책을 썼습니다. 첫 번째 책의 제목은 “메리 케이”. 자신의 일생을 담은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7개국 언어로 번역돼 100만 부 이상이 팔렸습니다. 또 다른 책은 “사람 경영의 메리 케이”였습니다. 세 번째 책은 1995년에 나왔는데, “메리 케이-당신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라는 제목이었습니다. 메리 케이는 이들 책에서 얻어진 이익금을 암 치료 기관에 기증했습니다.

메리 케이는 1996년 78세 때 뇌졸중으로 쓰러질 때까지 경영일선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2001년 11월 83세로 타계했습니다. 경영 전문가들은 매리 케이가 사람들을 배려하는 중요한 기업계 지도자였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미용 상담사들은 매리 케이가 여성들이 돈을 벌면서 여전히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개발해 많은 여성에게 살 길을 열어주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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