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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국인입니다] '미시간 겨울을 견뎌낸 아프리카 소년' 쏜 모지스 촐


유엔 재단(United Nations Foundation)에 강연자로 초청된 쏜 모지스 촐 목사.

고난과 역경을 뒤로하고 이제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며 살아가는 난민들의 이야기, ‘나는 미국인입니다’. 오늘은 로스트보이 출신으로 미국에서 워싱턴 D.C. 정부 공무원이자 기독교 목사된 쏜 모지스 촐 씨의 두번째 이야기 입니다.


고난과 역경을 뒤로하고 이제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며 살아가는 난민들의 이야기, ‘나는 미국인입니다’. 안녕하세요? 김현숙입니다.

아프리카 딩카족 용사를 꿈꿨던 소년 쏜 모지스 촐 씨. 남수단 시골 마을에서 가축을 기르며 평화로운 어린 시절을 보낸 촐 씨는 하지만 1980년대 초 발생한 내전으로 인해 부모와 집을 잃고 아프리카를 대륙을 떠도는 로스트보이(Lost Boys)가 되고 말았습니다.

[녹취: 쏜 모지스 촐] “당시 유일하게 남은 두 남동생과 사촌들과 함께 소년병으로 훈련받았습니다. 우리와 함께했던 몇몇 남수단 민병대 군인들이 우리를 훈련했죠. 엄격한 훈련 덕에 딴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씩씩하게 잘 자랐던 것 같아요.”

남수단을 떠나 에티오피아와 케냐로 이어지는 10여 년의 고된 여정, 촐 씨는 소년병 훈련을 받으며, 다른 로스트보이들과 서로 의지하며 힘든 시간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촐 씨에게 행운이 찾아왔는데요. 케냐 ‘카쿠마’ 난민촌에 있던 1만6천 명의 로스트보이 중 미국 입국이 허가된 3천800명 가운데 한 명으로 뽑힌 겁니다.

2000년 12월, 촐 씨는 난민 신분으로 미국에 오게 됐는데요. 하지만 아프리카 초원에 살던 소년이 미국, 그것도 추운 겨울로 유명한 미시간주의 도시에서 살아가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녹취: 쏜 모지스 촐] “미국 입국이 허가 났을 땐 정말 신나고, 흥분되고 또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같이 오지 못하는 친구들 생각에 마음이 무겁기도 했고, 무엇보다 미국에 대해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막막하고 두려운 마음도 있었죠. 그런데 미국에 오기 전 난민촌에서 미국에 대한 교육을 받았거든요? 그때 한 영상을 보여줬는데 애리조나주의 사막이 나오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미국도 아프리카와 별로 다를 게 없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웬걸요. 저는 미시간주로 왔잖아요. 그것도 12월에요. 정말 너무너무 추웠습니다. 평생 본 적도 없는 눈이 무릎까지 쌓이는데… 정말 얼어 죽을 뻔했습니다.”

지난 2006년 미시건에서 대학을 다닐 당시 쏜 모지즈 촐 씨.
지난 2006년 미시건에서 대학을 다닐 당시 쏜 모지즈 촐 씨.

그런데 낯선 건 추운 날씨뿐 만이 아니었습니다. 아프리카 난민촌에서 온 17살 소년에게 미국은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녹취: 쏜 모지스 촐] “음식도 너무 달랐어요. 피자나 햄버거 같은 건 본적도 없었으니까요. 영어도 힘들었어요. 난민촌에서 영어를 쓰긴 했지만, 영국식 영어였거든요. 미국식 영어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몇 개월이 걸렸습니다. 게다가 학교에 가니까 다들 컴퓨터를 사용하는데, 컴퓨터를 본 적도 없었던 저는 교실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었죠. 켤 줄도 몰랐으니까요. 겨우 컴퓨터 사용하는 법을 배워서 처음으로 한 게 인터넷 검색 사이트인 구글에서 고향 남수단을 찾아본 겁니다. 화면에 고향 모습이 나오는 걸 보고 정말 신기한 물건이라고 생각했어요.”

촐 씨가 미국을 낯설어하듯, 미시간 이웃 주민들 역시 아프리카에서 온 촐 씨를 낯설어했다고 합니다.

[녹취: 쏜 모지스 촐] “아프리카 사람들은 모두 인종이 같으니까 흑인이라는 지칭이 아예 없고 또 제 피부가 검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어요. 그런데 미국에선 저보고 흑인이라고 부르고 또 가끔 절 보고는 어떻게 이렇게 피부가 검냐며 놀라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또 제 키가 너무 크다고 놀라기도 하고요. 저는 딩카족 출신인데 딩카족 사람들이 원래 다 크거든요. 190cm 정도 되는 제 키는 평균에 불과한데 미국에 오니 사람들이 키가 크다고 난리였어요."

낯선 환경에서, 아기가 걸음마를 배우듯 미국 생활을 시작하게 된 촐 씨. 하지만 촐 씨는 결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녹취: 쏜 모지스 촐] “제게 가장 큰 도움이 됐던 건 바로 지역사회의 도움이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지역 사회가 돕고 있다는 걸 느꼈죠. 도움의 손길이 여기저기에서 전해졌어요. 또한, 저는 미국이야말로 내 꿈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나라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정말 아무것도 없이, 0에서 시작했으니까 이제 앞으로 채우고 성장할 날만 남았다는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미국에 입국했을 당시 17살이었던 촐 씨는 18살부터는 성인으로 인정돼 아무 도움을 받지 못한 친구들과는 달리 포스터 부모라고 하는 양부모님도 만나게 됐고, 여러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녹취: 쏜 모지스 촐] “전 기독교 루터교 단체를 통해 미국에 왔어요. 이 단체가 저를 후원해서 미시간주로 올 수 있었고 또 양부모님도 주선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잠시 양부모님 집에서 살다가 저를 집에서 나가게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저는 아프리카에 있을 때 가족과 함께 산 적이 없잖아요. 늘 또래 친구들과 의지하며 살았기 때문에 가족과 함께 사는 게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집에서 나와 난민 청소년들이 모여 사는 그룹홈이라는 곳으로 가게 됐습니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촐 씨는 친구들과 의지하며 미국에서의 생활을 개척해 나가게 됩니다. 하지만 그룹홈에 살게 되면서 학군이 바뀌어 전학을 가야 하는 상황이 됐는데요. 이때 아버지가 되겠다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녹취: 쏜 모지스 촐]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 제가 전학 가는 걸 원하지 않았어요. 교장 선생님이 당신 집에서 같이 살자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동생들과 떨어질 수 없다고 했죠. 그래서 결국 두 동생과 함께 교장 선생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제 양아버지가 돼주신 거예요. 어떻게든 저희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길 원하셨던 교장 선생님, 아니 양아버지 덕에 우리 세 형제 모두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촐 씨의 이런 사연이 알려지면서 미국의 유명 언론들이 촐 씨 이야기를 다루기 시작했고, 바로 이때 수단 출신 고아들을 가리키는 ‘로스트보이’, ‘로스트걸’ 이라는 표현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또 이렇게 언론을 통해 촐 씨의 이야기가 미국 사회에 알려지면서 로스트보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녹취: 쏜 모지스 촐] “어릴 때 부모님이 없이 자라면서 우리 형제들과 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육이 우리의 아버지이자 어머니이다’ 라고요. 난민촌에서도 정말 힘든 환경이었지만, 우리들은 어떻게든 공부는 해야 한다는 생각에 난민촌에 있던 학교에 다 다녔습니다. 사실 미국에 처음 왔을 땐 군대에 갈까 생각했어요. 소년병 출신이니까 군대 적응이 쉬울 것 같더라고요. 하지만 내가 늘 놓지 않았던 공부를 붙들었어요. 고등학교 졸업 후엔 지역전문대학에 진학했고, 2년 후엔 4년째 대학으로 편입해서 1년 반 만에 학사학위를 땄습니다.”

촐 씨는 대학에서 공부할 때도 학비를 지원해준 독지가 덕분에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미시간주에서 많은 사랑과 지원을 받으며 미국에 정착한 촐 씨는 미국에 온 지 8년 만에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되는데요. 바로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로 진출하게 된 겁니다.

네, 미국에 정착한 난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나는 미국인입니다', 오늘은 쏜 모지스 촐 씨의 두 번째 이야기와 함께했습니다. 다음 주에는 촐 씨가 워싱턴 DC에서 꿈을 이루게 되는 과정을 들어보려고 하는데요. 기대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김현숙이었습니다. 함께 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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