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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맥도날드 왕국 건설' 레이먼드 앨버트 크록


맥도날드 가맹점 사업 방식을 처음으로 시작한 레이 크록이 지난 1955년 맥도날드 가게 앞에서 햄버거를 들고 있다.
맥도날드 가맹점 사업 방식을 처음으로 시작한 레이 크록이 지난 1955년 맥도날드 가게 앞에서 햄버거를 들고 있다.

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각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소개해드리는 '인물 아메리카'입니다. 오늘은 맥도날드 햄버거 식당의 세계적인 왕국을 건설한 레이먼드 앨버트 크록을 소개합니다.

[인물 아메리카 오디오] '맥도날드 왕국 건설' 레이먼드 앨버트 크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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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날드 햄버거 식당의 세계적인 왕국을 건설한 레이먼드(레이) 앨버트 크록.

맥도날드는 간편하고, 빠르고, 값싸고, 어느 매장에서나 똑같은 맛을 내는 식당, 가장 대표적인 fast food 또는 속성 음식점입니다. 현대인의 식생활에 중요한 부분으로 뿌리를 내린 패스트푸드 식당의 하나인 맥도날드에서는 햄버거 샌드위치, 튀긴 감자, 생선튀김, 각종 음료 등을 팔고 있습니다.

미국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속성식당 연쇄점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맥도날드는 규모 면에서 단연 다른 업체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2015년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는 만 5천여 개, 캐나다에는 만 4천여 개 식당이 있고, 세계적으로는 118개 나라에 3만6천여 개가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하루 평균 6천 900만 명이 맥도날드 햄버거 가게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국제적으로 시장경제를 상징하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편의점인 7-11, 둘째가 청량음료인 코카콜라, 셋째가 바로 맥도날드 햄버거라고 하는 말도 있는데요, 이렇게 유명해진 맥도날드 체인의 매상은 2016년에 무려 246억2천만 달러에 달했습니다. 한국에도 88 서울올림픽 후에 상륙을 했고, 한때 북한에도 들어간다는 말이 나돌았지만 성사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레이 크록이 맥도날드 fast food 사업을 처음 시작한 건 아닙니다. 1940년대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주의 샌버나디노라는 곳에 맥 맥도날드와 딕 맥도날드라는 두 형제가 운영하는 조그마한 식당이 있었습니다. 꽤 손님이 많은 식당이었습니다. 여기에서는 가지 수도 많지 않고 간단한 음식, 특히 햄버거 샌드위치를 주로 팔았습니다. 이 식당을 인수하고 운영 방식을 개선해서 대규모 가맹점 체제로 키운 사람이 바로 레이 크록입니다.

레이 크록은 식당에서 쓰는 물건을 팔고 있었습니다. 1954년 어느 날 맥도날드 햄버거 집에 밀크쉐이크라는 음료를 만드는 기계를 팔러 갔습니다. 그런데, 이 식당이 참 특이한 운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손님이 직접 카운터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보통 식당들처럼 기다리지 않고 즉시 음식이 나오고, 깨끗하고, 값도 싸고요. 그래서 나도 이와 똑같은 식당을 운영하고 싶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레이 크록은 맥도날드 형제에게 똑 같은 모양의 식당을 열게 해달라, 대신 거기에서 나오는 수익금의 일부를 떼어주겠다 그런 제의를 했습니다. 그는 맥도날드 형제의 복사판 식당 개업 계약을 체결하고 다음 해인 1955년 일리노이주 데스 플레인스에 식당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레이 크록은 맥도날드 형제의 모든 권리를 사들입니다. 똑같은 경영방식의 가맹점 체제, 즉 맥도날드 햄버거 식당 프랜차이즈는 이렇게 시작이 됐습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약 70%의 맥도날드 식당은 주인이 다릅니다. 본사는 똑 같은 회사 이름, 경영방식, 상표, 음식 종류 등을 판매하도록 허용하는 대가로 판매액의 일부를 받게 됩니다. 대부분의 재료는 본사에서 공급하는 것을 사다 써야 합니다. 본사에서는 공동의 광고, 교육 훈련 같은 것 등을 제공합니다. 그러니까 가맹점이 늘어날수록 본사의 수입은 늘어나게 됩니다.

이 식당이 매우 인기가 있자 레이 크록은 여러 군데 식당을 열었습니다. 또 수많은 사람들이 맥도날드 햄버거 가맹점을 하겠다고 신청이 쇄도해, 결국 미국은 물론 세계적인 연쇄점 망을 형성하게 됐습니다.

레이 크록이 처음부터 사업에 성공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했습니다. 레이 크록은 1902년 미국 중부의 대평원 지대인 일리노이 주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1차 세계 대전 때는 적십자사에 들어가 트럭 운전을 했습니다. 음악 교사였던 어머니한테서 피아노를 배웠기 때문에 한때는 재즈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피아노를 연주하다 릴리 튤립 컵 회사(Lily Tulip Cup Company)에서 종이컵 판매일을 했습니다. 또 그 다음에는 남부의 플로리다 주에서 땅 장사를 했습니다. 거기서 쫄딱 망하는 아픔을 겪습니다. 그리고 빈손으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2천200km나 되는 먼 거리를 차를 몰고 되돌아 오는 레이 크록의 회고담에는 ‘내 생전에 그때의 그 긴 여정은 잊을 수가 없다, 길은 얼어서 미끄럽고 추웠으며, 겨울 옷도 가진 것이 없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 난 무척 추워 떨었고, 돈도 한 푼 없었다’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처음 식당을 열었을 때 그의 나이는 52세, 어떤 사람들은 은퇴를 생각할 나이였습니다. 늦은 나이인데도 세계적인 기업을 일으킨 그의 사업 수완이라 할까 경영 철학은 일반 대중이 무얼 원하는지 파악하는데 뛰어났다는 점입니다. 그는 미국 가정들이 가끔씩 외식하기를 즐긴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미국 성인 중 최소 25%는 매일 패스트푸드(fast food) 식당을 이용한다는 통계가 있는데 이런 사실을 일찌감치 꿰뚫어 본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도 주목했습니다.

레이 크록은 미국인들이 기본적으로 소고기 햄버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다른 건 몰라도 소고기 겹빵을 잘 만들 자신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갈수록 바빠지는 오늘날 빠른 서비스, 일관성 있는 맛, 저렴한 가격을 표준화해서 음식을 공산품처럼 찍어내겠다는 발상은 레이 크록 이전에는 아무도 하지 못했고, 또 시대상으로도 잘 맞아 떨어졌습니다.

레이 크록은 때로는 화장실 청소를 직접 하기도 하고, 힌트를 얻기 위해 경쟁사의 쓰레기통도 뒤졌습니다. 가맹점을 수시로 암행 시찰도 했습니다. 맥도날드에는 하나의 속담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고급 양복을 입은 사람이 주차장에서 휴지를 줍고 있으면 즉시 달려가 도와라, 그 사람이 바로 레이 크록이다' 그런 말이 유행했다고 합니다.

맥도날드는 사업도 잘 하지만 비난도 많이 받았습니다. 우선 비만을 촉진하고 건강을 해치는 이른바 정크푸드(junk food), 즉 쓰레기 같은 음식을 판다는 비판이 높습니다. 그래서 근래에는 야채 등 건강에 좋은 품목들을 내놓고 있습니다.

저임금으로 노동착취를 한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레이 크록은 도대체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고용창출에 기여했느냐며 항변했습니다. 인종이나 남녀, 학력, 나이 등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고 직원을 채용해 미국에만 42만 명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기업총수로서는 그렇게 주장할 만 했겠죠.

레이 크록은 자선사업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말년에는 크록재단(Kroc Foundation)이라는 자선 기금을 설립하고 각종 자선 사업을 벌였습니다. 대표적인 것은 어린이들의 건강과 복지를 위한 ‘Ronald McDonald House of Charities’입니다. 세계 각지에 366개나 되는 복지시설을 두고 있습니다.

레이 크록은 1984년 81세로 타계했습니다. 그가 남긴 가족의 재산은 5억 달러, 현 시세로는 15억 달러가 넘는 규모였습니다.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부인 조앤 크록 여사도 종교단체, 대학 연구소, 민권단체 등 190여 군데에 지원을 했습니다. 맥도날드 기금의 자선금액은 총 30억 달러가 넘습니다.

처음 문을 열었던 시카고 근교의 맥도날드는 헐리고 그 자리에는 방문자 센터가 새로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부근에는 박물관도 마련됐습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의 중요한 소득은 현금만이 아니다. 가장 멋진 것은 고객의 얼굴에 비치는 만족의 미소다. 미소를 지었다는 것은 다시 오겠다는 것이다. 다음에 그 고객은 또 다른 고객을 데리고 올 것이다', 맥도날드 박물관은 레이 크록의 이 같은 기업가 정신을 오늘도 생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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