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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역경을 뒤로하고 이제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며 살아가는 난민들의 이야기, ‘나는 미국인입니다’. 오늘은 로스트보이 출신으로 미국에서 워싱턴 D.C. 정부 공무원이자 기독교 목사된 쏜 모지스 촐 씨를 만나봅니다.


로스트보이(Lost Boys). 지난 1980년대 초 아프리카 수단에서 발생한 2차 내전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집을 잃고 아프리카 초원과 사막을 떠도는 로스트보이는 무려 2만 명에 달했는데요. 이 중엔 미국으로 오게 된 아이들도 있습니다. 오늘 만나볼 주인공 역시 로스트보이 출신인데요. 미국 공항에 도착했을 당시, 손에 들린 거라곤 비닐봉지에 담은 책 한 권이 다였지만, 지금은 워싱턴 D.C. 정부 공무원이자 기독교 목사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쏜 모지스 촐 씨입니다.

[녹취: 쏜 모지스 촐] “저는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엔 그냥 수단이었죠. 저는 시골에서 자랐는데요. 저희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시고, 가축을 기르셨어요. 저와 형제들 역시 학교에 다니지 않고 부모님을 도왔고요. 소와 염소, 닭을 치고 또 농사를 짓는 게 저희의 일이었습니다. 주위에 친척들, 사촌들과 다 함께 살면서 소박하지만, 너무나 평온하고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제 어릴 때 꿈은 훌륭한 딩카족 용사가 되는 것이었고요.”

딩카족 마을에서 자란 촐 씨와 동네 꼬마 아이들은 하나같이 멋진 용사가 될 것을 기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1983년, 수단에서 종족들 간의 내전이 발생하게 되고 4년 후인 1987년엔 촐 씨의 마을도 공격을 받게 됩니다.

[녹취: 쏜 모지스 촐] “우리 마을이 수단 북부 아랍 종족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그들을 집과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과 가축을 마구잡이로 죽였죠. 저희 부모님도 이때 돌아가셨어요. 저와 형제들 그리고 사촌들은 마을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작정 걷고 또 걷고… 무려 5개월을 걸었습니다. 먹을 것과 물도 없는 데다 극심한 더위 탓에 주로 밤에 걸었는데 사자와 같은 야생동물에 물려 죽은 사람들도 많고요. 강을 건너다가 강에 빠져 죽고, 군인들의 공격을 받아 죽고, 이동 중에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습니다.”

어린 소년이었던 촐 씨에겐 너무나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무엇보다 2만 명에 달하는 로스트보이들을 이끌어줄 어른은 소수에 불과했죠. 아이들은 서로를 의지하고 또 서로의 안전을 지키며 그렇게 걸었습니다.

[녹취: 쏜 모지스 촐] “5개월 후 강을 건너 에티오피아에 도착했습니다. 에티오피아에 ‘사바나’라고 부르는 초원 한중간이었고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흙집을 짓고, 땅을 일구어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몇 달 후에 미국 사람들이 우리가 있는 곳을 찾아왔어요. 그 때가 1988년이었는데요. 이후 유엔과 유엔난민기구(UNHCR)에서도 와서 식량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쏜 모지스 촐 씨가 지난 1990년 에티오피아 난민캠프에서 생활할 당시 찍은 사진. 사진제공 = 촐 씨.
쏜 모지스 촐 씨가 지난 1990년 에티오피아 난민캠프에서 생활할 당시 찍은 사진. 사진제공 = 촐 씨.

하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열악한 환경에서 모여 살다 보니 곧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말라리아, 콜레라, 설사 병 등으로 많은 아이가 죽어갔고 무엇보다 가족들을 잃은 아이들은 향수병을 앓거나 정신 질환을 갖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녹취: 쏜 모지스 촐] “에티오피아에서 그렇게 4년을 지냈어요. 그런데 에티오피아에서 내전이 발생해서 결국 에티오피아를 떠나야 했습니다. 1991년에 다시 또 강을 건너 수단으로 넘어왔습니다. ‘포찰라’라는 곳에 정착해서 몇 개월을 지냈어요. 그런데 정부군이 우리를 알고는 또 매일 총격을 가했습니다. 그래서 또 그 곳을 떠나야 했고요. 몇 개월을 걸어서 케냐 국경을 넘었습니다.”

촐씨는 케냐의 카쿠마 난민촌에서 보내게 되는데요. 딩카족 용사를 꿈꿨던 촐 씨와 형제들은 소년병이 되고 맙니다.

[녹취: 쏜 모지스 촐] “당시 유일하게 남은 두 남동생과 사촌들과 함께 소년병으로 훈련받았습니다. 우리와 함께했던 몇몇 남수단 민병대 군인들이 우리를 훈련했죠. 우린 다들 어렸지만, 사실 군사 훈련이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부모님을 잃고 집을 잃은 충격이 군사 훈련을 받으면서 많이 치유됐거든요. 엄격한 훈련 덕에 딴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씩씩하게 잘 자랐던 것 같아요.”

내전으로 집을 잃고 난민 신세가 됐던 로스트보이는 2만 명이었지만, 힘든 여정 가운데 끝까지 살아 남아 케냐 카쿠마 난민촌에 모인 아이들은 1만6천 명에 불과했습니다.

[녹취: 쏜 모지스 촐] “1992년에서 1999년까지 케냐에 머물면서 인터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특별 비자를 받기 위한 심사를 받았던 거예요.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낙후된 난민촌에도 머물 수 없는 아이들을 미국 정부가 받아주기로 한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에 가고 싶어하는 아이들은 1만6천 명이었지만, 미국이 받아줄 수 있는 아이는 4천 명도 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아주 치열한 경쟁이 시작된 겁니다.”

촐 씨는 UNHCR 등 여러 기관의 인터뷰와 심사과정을 통해 행운의 주인공 3천800명 가운데 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서 미국에 입국하게 됐는데요. 예상치 못했던 사건이 일어나고 맙니다.

[녹취: 쏜 모지스 촐] “첫 번째 미국 출국이 시작된 게 2000년 11월이었습니다. 저는 2001년 초에 입국했고요. 9월에 저희 동생들이 미국으로 입국할 차례였는데 미국에서 9.11 테러가 발생한 겁니다. 2001년 9월 11일, 바로 그날 저희 동생들을 태운 비행기가 미국으로 향하고 있었던 거예요. 결국, 그 비행기는 캐나다로 회항했고요. 사흘 후에 미국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 수단의 로스트보이 입국은 한참 동안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수단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과 연계돼 있다는 의혹 때문에 입국을 준비하던 로스트보이들은 결국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지 못하게 됐는데요. 촐 씨와 동생들이 마지막으로 미국에 입국한 로스트보이들이 돼 버린 겁니다.

[녹취: 쏜 모지스 촐] “저는 빚을 진 기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1만6천 명의 로스트보이 가운데 미국 입국자 명단에 들어갈 수 있었고, 또 9.11테러가 발생하기 전에 미국에 올 수 있었으니까요. 거기다 제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가 17살이었는데, 18살부터는 성인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난민으로 와도 특별한 지원이 없거든요. 하지만 전 17살이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양부모 가정을 만날 수 있었고, 고등학교에도 갈 수 있었고 모든 교육 혜택과 지원을 받을 수 있었어요. 같이 온 친구 중엔 18살인 아이들도 있었는데 불과 몇 개월 차이로 미국에서의 첫 출발이 달랐던 거죠. 저에겐 정말 특별한 행운이 따랐습니다.”

네, 미국에 정착한 난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나는 미국인입니다', 오늘은 남수단 출신으로 전쟁고아인 로스트보이에서 성공한 미국인으로 인정 받는 쏜 모지스 촐 씨의 첫 번째 이야기와 함께했습니다. 다음 주에는 촐 씨의 미국 정착과정을 들어보려고 하는데요. 기대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김현숙이었습니다. 함께 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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