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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미국 적십자 설립자' 클라라 바튼


미국 적십자사, American Red Cross를 설립한 클라라 바튼.
미국 적십자사, American Red Cross를 설립한 클라라 바튼.

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각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소개해드리는 '인물 아메리카'입니다. 미국 적십자사, American Red Cross를 설립한 클라라 바튼을 만나보시겠습니다.

[인물 아메리카 오디오] 클라라 바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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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피고 미국 적십자사, American Red Cross를 설립한 클라라 바튼.

미국 적십자사는 국내는 물론 세계 여러 지역의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는 미국 최대의 구호 기관 중 하나입니다. 적십자 운동은 스위스의 앙리 듀낭이 1863년에 출범했습니다. 미국은 그보다 늦은 1881년에 클라라 바튼에 의해 출범했습니다. 늦게 출발했지만, 오늘날 미국 적십자사는 어느 나라보다 크고 활발한 구호기관으로 존재합니다.

클라라 바튼은 1821년 12월 25일, 미국 동북부 매사추세츠주 노스옥스포드(North Oxford)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스테픈 바튼은 미국 민병대 대위 출신이었습니다. 위로는 두 언니와 두 오빠가 있었습니다. 클라라 바튼은 무척 수줍은 아이여서 공부를 하거나 친구를 사귀는 데 무척 힘들어 했습니다. 부모들은 클라라를 집에서 가르쳤습니다. 다행히 오빠 중 한 사람이 선생님이어서 읽기, 쓰기, 산수를, 아버지한테서는 지리와 역사를 배웠습니다.

클라라 바튼은 교사를 거쳐 워싱턴의 정부기관에서 일을 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남북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1861년 워싱턴에서 별로 멀지 않은 볼티모어라는 곳에서 전투가 있었습니다. 이때 북군으로 참여했던 병력 중에 클라라 바튼의 고향에서 온 부대가 있었습니다. 이 부대의 부상병들은 워싱턴으로 후송이 됐는데, 클라라는 혹시 고향 출신이 있지 않을까 해서 기차 정거장으로 가봤습니다.

뜻밖에도 아는 사람을 여러 명을 만난 클라라 바튼은 만사를 제쳐놓고 그들을 보살피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클라라 바튼은 직장을 그만두고 병원에 와 있는 장병을 간호하는 일에만 전념을 하게 됐습니다. 클라라 바튼은 부상 당한지 얼마 안 돼 치료를 했더라면 여러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클라라 바튼은 전투 현지에서 부상병을 치료하는 계획을 갖고 고위 지휘관을 찾아갔습니다. 당시 군대 규정으로는 남자 외에는 어떤 사람도 전투 지역에 들어 갈 수가 없게 돼 있었지만, 지휘관은 클라라의 간절한 말을 듣고 그것을 허용했습니다.

클라라 바튼은 워싱턴과 접한 버지니아주의 불런(Bull Run)이라는 곳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몇 명의 여성들과 함께 그곳으로 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불런에서는 남군과 북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북군이 참패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곳곳에 부상병들이 쓰러져 있고 또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클라라 바튼은 잠도 자지 못하고 부상병들을 돌보았습니다. 그 후 4년 동안 클라라 바튼은 처참한 남북 전쟁의 현장을 돌아다니며 부상병을 돌보았습니다.

클라라 바튼의 활동은 여성도 극한 상황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또 여성도 부상병들을 치료를 해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환자의 간호라는 일이 영예로운 직업이라는 사실을 일깨웠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클라라 바튼의 의사는 그녀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너무 피곤해 있다며 휴식을 취하도록 유럽으로 보냈습니다. 클라라 바튼은 유럽에서 국제적십자 대표를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적십자 정신에 완전 매료가 됐습니다.

전쟁 시 부상당한 모든 군인을 돌봐주어야 한다. 아군이든 적군이든 어떤 인종이든 가리지 않는다. 적십자사에 종사하는 대원들, 의사, 간호사를 절대 납치하거나 감옥에 넣으면 안 된다. 화재, 홍수, 태풍, 바람, 지진 등 인간이 고통 받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돕고 나눈다. 모든 봉사는 무료다. 클라라 바튼은 이런 적십자 정신에 ‘바로 이거다’라고 느꼈습니다. 동시에 그런 조직에 미국이 동참하지 않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습니다. 강대국으로서는 유일하게 미국만이 국제적십자를 거부한 나라였습니다.

미국에 돌아오자 클라라 바튼은 즉각 미국 적십자 창설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클라라 바튼은 정부 요인, 의회, 사회 지도자들에게 서한을 보내 미국 정부가 국제적십자 위원회를 비준하도록 애를 썼습니다. 1878년 러더포드 헤이스 대통령에 이어 후임 체스터 아서 대통령도 찾아가 전쟁 희생자뿐만이 아니라 각종 자연재해에도 구호활동을 하겠다고 역설해 적십자 미국 지부의 설립 허가를 받아냅니다. 클라라 바튼은 드디어 1881년 5월 21일, 워싱턴에서 미국 적십자사의 공식 회합을 갖고 자신이 총재에 취임합니다.

재임기간 25년 동안 클라라 바튼 총재는 눈부신 활동을 벌였습니다.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텍사스 등에서 발생한 대규모 자연재해 피해자들을 도왔고, 플로리다에서는 황열병이 발생하자 50명의 의사와 간호사들을 동원해 감염자들을 치료했습니다. 러시아와 아르메니아의 굶주리는 사람들도 도왔습니다. 중동의 전쟁에도 구호를 했고, 78세의 고령일 때도 쿠바의 병원을 찾아가 환자들을 도왔습니다.

클라라 바튼의 지도에 따라 미국 적십자사는 이재민 구호뿐 아니라 혈액 제공, 군인 가족 지원, 국제 원조 등 여러 분야로 활동 범위를 넓혀갔습니다. 소요되는 자금이나 인력은 모두 기부와 자원봉사로 처리했습니다.

오늘날 미국 적십자사는 전국 650여 개의 지부에 3만여 명의 직원, 500만여 명의 자원봉사자를 두고 연간 7만 건이 넘는 재난 구호를 하고 있습니다. 36군데의 혈액 센터가 있고, 3천여 개 병원과 재난 지역, 전쟁터 등에 긴급 혈액을 제공하는 미국 최대의 공급처이기도 합니다. 미국 적십자사는 이런 활동을 위해 모금한 금액만도 연간 70억 달러에 가깝습니다. 클라라 바튼은 80대 중반 은퇴를 하고 1912년 4월, 90세로 타계했습니다.

수줍고 조그마한 체구였지만 거대한 삶을 산 클라라 바튼. 그가 시작한 일은 오늘날까지도 어려움에 처한 수 많은 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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