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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국인입니다] '살해 협박 피해온 남매' 타밈 알말리키 (1)


타밈 알말리키, 알리 알말리키 남매가 집에서 중동식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

고난과 역경을 뒤로하고 이제는 미국인의 한 명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며 살아가는 난민들의 이야기, ‘나는 미국인입니다’. 안녕하세요? 김현숙입니다. 난민들의 사연을 들어보면 저마다 난민으로 내몰린 이유가 다 있는데요. 오늘의 주인공은 살해 협박을 피해 결국 난민이 된 여성입니다.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에 의해 동생 한 명을 잃고, 살해 협박에 시달리던 또 다른 동생과 함께 국경을 넘은 이 여성은 10년 전 미국에 정착했는데요. 이라크에서 온 타밈 알말리키씨와 그의 동생 알리 알말리키 씨의 이야기를 만나봅니다.

[현장음: 타밈 알말리키 집]

말알리키 씨 남매가 늦은 아침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따뜻한 차와 중동식 빵이 있는 아침 식탁. 동생에게 과일을 더 줄까, 빵을 좀 데워줄까 물어보는 누나 타밈 씨는 6남매 중 장녀로, 하는 행동이 영락없는 큰딸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평화롭게 아침 식사를 즐기지만, 타밈 씨의 어린 시절은 평화로움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합니다.

[녹취: 타밈 알말리키]
“제가 어릴 때 이라크는 사담 후세인의 독재정권하에 있었어요. 저희 삼촌 두 분은 후세인에 의해 살해당했고, 사촌 두 명은 1980년대 이란과의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저희 집은 중산층 가정으로 경제적으로는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늘 공포스러운 분위기에서 살아야 했어요. 저희 부모님은 교육을 강조하시면서도 정치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죠. 저의 삼촌들도 후세인 정권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살해되셨거든요.”

타밈 씨와 형제들은 학교 공부에 집중하면서 정치와는 상관없이 살아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 수니파가 정권을 잡은 이라크에서 또 다른 이슬람 종파인 시아파로 살아가는 타밈 씨 가정엔 어려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녹취: 타밈 알말리키]
“저는 이라크에 살 때 이슬람 여인들이 쓰는 머리 가리개인 히잡도 쓰지 못했어요. 히잡을 쓰면 이라크와 앙숙인 이란에 충성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단속을 했거든요. 저흰 이슬람 시아파이긴 했지만, 이란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어요. 하지만 저희 고모는 히잡을 썼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18살에 감옥에 가셔서 10년 후에 풀려나셨어요.”

지금은 40대 초반인 타밈 씨가 경험한 80년대는 지금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녹취: 타밈 알말리키]
“어릴 때 이란인 포로들을 거리에서 많이 봤어요. 우리 이웃 중에도 이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살해당한 사람이 많았고요. 학교 다닐 때도 가장 중요하게 배웠던 것이 ‘반이란 정신’이었어요. 이란 전쟁 때는 시골로 도망을 가고, 걸프전 때도 피난을 가고… 수없이 도망과 탈출을 하며 살았죠.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최대한 우리가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셨고, 6형제 모두 공부를 다 잘 했어요.”

대학을 졸업한 타밈 씨는 20대 후반부터 고향인 이라크 남부 아마라 지역에서 미국이 운영하는 비영리 단체, NGO에서 일하게 됩니다.

[녹취: 타밈 알말리키]
“지난 2003년부터 미국 NGO 단체들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프로젝트 관리자로 이라크 내부 난민들을 돕는 일을 했습니다.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면서 이란 등 이웃 나라로 떠났던 사람들이 이라크로 돌아왔지만, 정부가 모든 재산을 몰수하면서 오갈 데 없는 난민이 된 사람들이 많았죠. 주로 그런 사람들의 재정착을 도왔어요. 그리고 미 국무부 산하 대외 원조 기관인 ‘국제개발처(USAID)’가 진행하는 ‘이라크 민주화 운동’에도 참여했는데요. 미국인 국장 밑에서 부국장으로 일하면서 일도 많이 배웠지만, 영어도 많이 늘었습니다.”

활달한 성격에 투철한 책임감, 그리고 영어 실력까지 갖춘 타밈 씨는 구호 전문가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1년 후,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납니다.

[녹취: 타밈 알말리키]
“하루는 코카콜라를 사려고 가게를 갔는데 가게 점원이 저를 너무 불쌍하게 쳐다보는 거예요. 이해할 수 없었죠. 그리곤 거리로 나왔는데 또 다른 사람이 저를 너무 애처롭게 쳐다보는 거예요. “다들 왜 이러나?” 하고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때마침 만난 이웃이 동네를 한번 둘러보라고 하는 거예요. 살펴봤더니, 동네 벽마다 저를 살해하겠다는 협박의 글이 적혀 있었죠. 제 이름이 적혀있고, ‘너는 미국의 간첩이다, 미국인을 위해 일했으니 너와 너의 동생들을 죽이겠다.” 이렇게 적혀 있었어요.”

알리 알말리키 씨가 집 거실에 놓여 있는 동생 하이더 씨의 사진을 가리키고 있다. 하이더 씨는 2006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 살해됐다.
알리 알말리키 씨가 집 거실에 놓여 있는 동생 하이더 씨의 사진을 가리키고 있다. 하이더 씨는 2006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 살해됐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이 같은 협박에 타밈 씨 아버지는 집에 경비원을 채용했고 타밈 씨는 일을 그만두고 집 안에만 머물러야 했습니다. 창살 없는 감옥 생활을 하게 된 거였습니다.

[녹취: 타밈 알말리키]
“전 당장 이라크에서 탈출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무 데도 갈 수 없었어요. 우리를 받아줄 곳이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3년 후인 2007년에 바로 아래 동생 알리와 함께 요르단에 갔어요. 부모님은 여동생 세 명을 돌보셔야 했기 때문에 함께 갈 수 없었죠.”

타밈 씨와 동생 알리 씨는 불법 거주자들이긴 했지만, 요르단에서 머물 수는 있었다는데요. 하지만 알리 씨는 당시 어려웠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녹취: 알리 알말리키]
“유엔과 요르단이 협약을 맺어서 이라크 난민들이 보호를 받긴 했지만, 요르단에서 추방되는 것만 막아줄 뿐 다른 것은 기대할 수 없었어요. 그리고 요르단에서 살다가 떠날 때는 요르단에 머물렀던 시간만큼 벌금을 내야 했어요. 공항에서 출국 전에 벌금을 내지 않으면 다시는 요르단에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타밈 씨와 알리 씨는 요르단에 5개월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난민들에 비하면 훨씬 짧은 기간에 난민으로 인정받아 미국으로 올 수 있었다고 하네요.

[녹취: 알리 알말리키]
“우리는 운이 좋았어요. 난민 인터뷰를 위해 10년을 기다린 사람들도 있었으니까요. 우리가 5개월 만에 난민 자격으로 미국에 가게 된 것을 보고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그런데 사실 저희는 특별한 사례로, 신속 절차를 밟았던 거예요. 우리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로부터 살해 협박을 받았으니까요. 미국인이나 미국 단체를 일했다는 이유로 살해 협박을 받은 경우는 긴급한 경우로 인정해줬고, 난민 입국 절차를 빨리 진행해 줬거든요.”

알말리키 남매의 난민 절차가 빨리 진행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두 사람의 남동생이 1년 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됐기 때문인데요. 살해된 남동생은 미국 NGO와 함께 일하며 ‘이라크의 미래’라고 불릴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은 젊은이였고, 이 동생의 죽음은 타밈 씨와 알리 씨가 미국으로 오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고 합니다.

네, 미국에 정착한 난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나는 미국인입니다', 오늘은 이라크 출신 타밈 알말리키 씨와 알리 알말리키 씨 남매의 이야기와 함께했습니다. 다음 주에는 알말리키 남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또 다른 동생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하는데요. 기대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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