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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지난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투하이 투하된 모습(왼쪽)과 같은 달 9일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모습. 사진 = Charles Levy. (자료사진)
지난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투하이 투하된 모습(왼쪽)과 같은 달 9일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모습. 사진 = Charles Levy. (자료사진)

뉴스의 배경과 관련 용어를 설명해드리는 뉴스 따라잡기 시간입니다. 지난 월요일(11일),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이 주요 7개국 외무 장관 회담이 열리는 히로시마를 방문해 평화기념공원을 찾았습니다. 미국 현직 정부 각료가 이 공원을 찾은 건 이번이 처음인데요. 미국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나라였기 때문에 케리 장관의 이번 방문이 갖는 의미는 더 크다고 하겠습니다. 뉴스 따라잡기, 오늘은 일본 히로시마 원폭 투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박영서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인류 역사 최초의 원자 폭탄 “

[녹취: 히로시마 원폭 투하 영상음]

1945년 8월 6일 월요일 오전 8시경. 미국의 B-29 전투기가 일본 히로시마 시에 원자 폭탄 하나를 투하했습니다. 길이 3m, 무게 약 4t의 이 원자폭탄은 가공할 위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원자폭탄이 터지면서 거대한 섬광과 함께 버섯 모양의 구름 기둥이 치솟았고 8만여 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도시는 거의 전부 다 잿더미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로부터 사흘 뒤인 8월 9일, 또 다른 B-29 미군 전투기가 이번에는 나가사키 시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습니다. 나가사키 시에서는 약 4만 명이 즉사했고요. 이후 두 도시에서 방사능 노출과 관련해 목숨을 잃은 사람은 수백만 명에 달합니다. 연합군의 항복요구에 끝까지 버티던 일본 왕 히로히토는 결국 나가사키 공격 6일 만인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녹취: 히로히토 일왕 항복 발표]

이로써 약 6년간의 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습니다. 2차 세계대전은 인류사 최초로 원자 폭탄이 전쟁에 사용됐고, 수백만 명의 인명을 앗아간 인류 역사상 최악의 참혹한 전쟁이었습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의 표적이 된 이유”

당시 미국의 핵 개발을 담당했던 ‘맨해튼 프로젝트'와 '미군표적위원회'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원자 폭탄을 투하할 장소로 몇 개 도시를 놓고 검토에 들어갔습니다. 목표 도시 선정의 기준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폭격으로 일본이 받을 충격의 정도, 또 국제적으로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지 등이었는데요. 도쿄는 일본 천황의 궁이 있고 일본의 수도라는 점에서 검토 대상이 됐지만, 전략적 요충지가 아니고 인구 밀도가 높다는 점에서 배제됐고요. 교토, 히로시마, 고쿠라, 나가사키 등의 도시가 검토 대상이 됐는데요. 최종적으로 선정된 도시가 히로시마였고요. 임무 수행 중 변수가 생길 경우, 다음 공격 목표 도시가 고쿠라와 나가사키였습니다.

히로시마는 당시 산업 도시에다가 군사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일본 영토 남쪽 전체를 방어하는 제 2육군 총사령부와 5사단 사령부가 주둔 중이었고요. 또 군수품 공장이 있어 군사적으로 중요한 거점 지역이었죠. 그런가 하면 히로시마는 당시 연합국의 폭격을 당하지 않은 몇 안 되는 도시 가운데 하나였는데요. 때문에 원자 폭탄의 폭발 규모를 측정할 수 있게 했습니다.

“전쟁의 잿더미에서 다시 일어선 히로시마”

히로시마는 일본 열도에서는 가장 큰 섬인 혼슈 섬의 최남단 주고쿠 지방에 있는 도시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주고쿠 지방에서는 가장 큰 도시인데요. 전쟁 초기 히로시마 인구는 38만여 명에 달했고요. 원폭 투하 당시 인구가 약 35만 명 정도 되는 것으로 추산되는데요. 하지만 공식 문서가 소멸했기 때문에 정확한 수치는 파악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현재 히로시마는 인구 1백만 명이 넘는 대도시로 부흥했습니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근처에는 평화기념공원이 조성돼 있는데요. 오늘도 수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고 있습니다.

[녹취: 평화공원 방문객] “My grandfather died here at that time and I keep wondering what he felt ….”

이 여성은 할아버지가 당시 원자폭탄 공격으로 사망했다고 말하는데요. 그때 할아버지의 나이가 겨우 21살로 죽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였다면서 그때 할아버지는 어떤 심정이었을지 안타까워했습니다.

[녹취 평화공원 방문객] "I want everyone want to know what happened here Hiroshima..."

이 남성은 일본인 사진작가인데요. 당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든 사람이 알기 바란다며 사람이 저지르고 사람이 또한 피해자인 참혹한 역사를 통해 다시는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배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미국 국무장관의 역사적인 히로시마 평화공원 방문 “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냉전 시대에 접어들면서 미국과 일본은 적국이 아닌 동맹 관계가 됐지만 진주만과 히로시마는 70년 넘게 양국의 관계에서 금기시되는 문제였습니다. 그동안 여러 일본 총리가 미국을 찾았고, 미국의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지만 서로 진주만과 히로시마를 방문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승전국과 패전국 사이에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미국을 방문해 연방 의회 상하원 합동 연설까지 했지만, 진주만 방문은 미국 노병들의 반발로 허락되지 않았는데요. 이런 점에서 케리 장관의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방문은 역사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케리 장관의 방문을 두고 미국이 사과한 게 아니냐며 반발하는 목소리도 있는데요. 케리 장관은 자신의 방문이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를 위한 방문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제 다음 달이면 히로시마에서 주요 7개국 정상회담이 열리는데요. 그때 오바마 대통령도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찾을지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일본 주변국의 반응"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주변국은 케리 장관의 히로시마 평화 공원 방문에 불편한 시선을 보냅니다. 특히 중국은 강력히 반발하고 있는데요. 일본이 원폭 투하로 수많은 민간인이 사망한 것에 대한 사과를 받기 원한다면 과거 일본의 군국주의 당시 자행한 잘못부터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 남중국해 해역에서 벌어지는 긴장 상황 등 중국의 팽창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일본이 신밀월관계를 맺고 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한국의 언론도 썩 우호적이지만은 아닌데요. 원폭으로 인한 피해가 부각되면서 일본이 전쟁 가해자라는 사실이 잊혀지고 피해자인 양 한다며 비난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습니다.

뉴스 따라잡기, 오늘은 일본 히로시마 원폭 투하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박영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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