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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지난 1965년 2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미국 앨라배마 주 셀마에서 연설하고 있다.
지난 1965년 2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미국 앨라배마 주 셀마에서 연설하고 있다.

뉴스의 배경과 관련 용어를 설명해드리는 뉴스 따라잡기 시간입니다. 미국에서는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매년 1월 셋째 월요일을 마틴 루터 킹 데이로 제정해 이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뉴스 따라잡기, 오늘은 마틴 루터 킹 목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박영서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녹취] 마틴 루터 킹 목사 연설

1963년 8월 28일,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 워싱턴 기념탑 앞 광장에는 수십만 명의 군중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선언한 지 100주년을 기념해 모인 사람들이었는데요. 그들은 공평한 일자리와 자유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나에게는 꿈이 있다”던 그 유명한 연설이 있었습니다.

[녹취] 마틴 루터 킹 목사 연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언젠가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그 옛날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소유주들의 후손들이 형제가 되어 함께 앉아 있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 언젠가 자신의 네 자녀가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으로 평가받는 날이 오리라는 꿈을 갖고 있다고 포효합니다.

[녹취]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 현장음

그리고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그 꿈은 그로부터 50여 년 후, 이뤄집니다. 2009년 1월, 미국 건국 사상 처음으로 흑인 대통령이 탄생한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출생, 그리고 이름”

마틴 루터 킹 목사는 1929년 1월 15일, 미국 남부 조지아 주 애틀랜타 시에서 침례교 목사인 마틴 루터 킹 시니어와 어머니 앨버타 윌리엄스 킹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원래 이름은 마이클 킹이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아버지가 기독교 종교개혁가이자, 신학자인 마틴 루터에게 감명을 받아 자기 이름도 마틴 루터 킹으로 바꾸고, 아들 이름도 마틴 루터 킹으로 바꿨습니다. 킹 목사는 나중에 코레타 스콧이란 여성과 결혼하고요. 사이에 4명의 자녀를 뒀습니다.

“킹 목사는 언제부터 인종차별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걸까요?”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흑인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목사의 아들로, 당시 다른 흑인에 비하면 비교적 유복한 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또래 흑인 아이들과는 달리 교육도 받을 수 있었죠. 하지만 어릴 때 한 백인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친구의 아버지로부터 너는 유색인종이니까 우리 아이와 놀면 안 된다는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킹 목사가 처음으로 인종차별에 눈을 뜨게 된 사건이었는데요. 링컨 대통령이 흑인 노예해방을 선언한 지 100년이 지났지만, 당시 미국 사회 곳곳에는 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 관습이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특히 킹 목사가 나고 자란 조지아 주 애틀랜타 시는 남부 지방으로 흑인들을 차별하는 관습이 깊게 뿌리 박혀 있었죠.

킹 목사는 어릴 때 남달리 영특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애틀랜타 시에 있는 모어하우스 칼리지를 15살에 들어가 4년 후 졸업하죠. 이때 기독교와 인종 문제, 그리고 정치에 대한 가치관이 정립됩니다. 킹 목사는 이후 크로저 신학교를 거쳐, 보스턴 대학교에서 26살에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 킹 목사가 본격적으로 흑인 인권운동에 뛰어든 계기가 있다고요?”

네. 킹 목사는 배움에 대한 열정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학자로서 경력을 더 쌓고 싶어 했죠. 하지만 1954년, 남부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시에 있는 한 교회가 목사로 청빙하자 이를 수락하고 앨라배마로 갔습니다. 그런데 바로 얼마 뒤 킹 목사가 있는 바로 그 몽고메리 시에서 미국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 하나가 벌어집니다. ‘로자 팍스’라는 흑인 여성이 버스 앞자리에 있는 좌석을 백인에게 내어주지 않고 실랑이를 벌이다 경찰에 체포된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앨라배마 시에는 버스의 앞자리는 백인이, 뒷자리는 흑인이 앉는 관행이 있었거든요. 이 여성은 법적 소송을 벌였고 흑인 사회 지도자들은 이런 인종차별적 행태에 항의해 버스 안 타기 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합니다. 그리고 킹 목사가 이 운동을 이끌어 나갈 주도적인 인물로 선출됩니다. 그리고 버스 안 타기 운동은 전국적인 주목을 받게 됩니다.

“킹 목사를 왜 위대하다고 하는 걸까요?”

사실 당시 다른 흑인 지도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지도력도 있고 흑인 사회의 존경과 지지를 받는 사람들도 있었을 테죠. 말콤 X라는 이름의 흑인 지도자도 그런 사람 가운데 1명인데요. 그런데 킹 목사가 찾은 방법은 바로 비폭력이었습니다. 킹 목사는 폭력은 더 큰 폭력을 낳을 뿐, 비폭력만이 힘없는 흑인사회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자 탄압하는 자들의 굳어버린 양심과 도덕을 일깨울 수 있는 해결책이라고 믿었던 거죠. 그러다 보니 일부 흑인들로부터는 무기력한 타협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고요. 백인우월주의자로부터는 온갖 협박과 테러, 방화까지 당합니다.

하지만 킹 목사는 이런 비판과 협박에 굴하지 않고 비폭력과 사랑만이 불의한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요. 그의 이런 신념은 마침내 많은 백인의 양심을 움직이게 만듭니다. 실제로 1963년 8월 워싱턴 대행진에 참가한 군중 가운데 20%가량은 백인으로 추산된다고 하고요. 1965년에는 마침내 위대한 결실도 맺죠. 바로 린든 존슨 대통령이 흑인들의 참정권을 허용하는 법안에 서명함으로써 흑인들도 투표권을 얻게 된 것입니다.

“킹 목사 암살, 그리고 마틴 루터 킹 데이”

1963년,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은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합니다. 킹 목사는 타임이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최초의 흑인이었죠. 그리고 이듬해인 1964년, 킹 목사는 노벨 평화상을 받습니다. 역대 가장 젊은 수상자였습니다. 하지만 1968년에 킹 목사는 한 극우파 백인에게 암살당합니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39살이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 후 미국에서는 그를 기리는 연방 공휴일을 지정하자는 움직임이 계속 있어왔습니다. 그러다 1983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때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탄생을 기리는 연방 공휴일이 공식 지정됩니다. 미국에서 개인을 기리는 연방 공휴일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과 미국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밖에 없고요. 민간인, 그것도 흑인을 기려 연방 공휴일이 지정된 건 미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해마다 마틴 루터 킹 데이가 되면 미 전국 곳곳에서는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를 기념하는 행사들이 펼쳐집니다.

네, 뉴스 따라잡기 오늘은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박영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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