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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A 창립 70주년 특집] 노금석의 자유를 향한 비행 (1)


1953년 9월 21일 소련제 미그15 전투기를 몰고 북한을 탈출해 김포 비행장에 도착한 노금석 씨. (노금석 제공)
1953년 9월 21일 소련제 미그15 전투기를 몰고 북한을 탈출해 김포 비행장에 도착한 노금석 씨. (노금석 제공)
6.25 전쟁 휴전협정이 체결된 지 두 달 만인 1953년9월, 북한 공군 조종사가 소련제 신형 미그-15 제트기를 몰고 한국으로 망명하는 대형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주인공은 당시 21살의 인민군 대위 노금석 씨. 노금석 씨는 한국 망명 직후 미국으로 건너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며 성공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올해로 80살이 된 노 씨는 59년 전 공산주의 치하에서 사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며, 죽음을 각오하고 북한을 탈출했다고 말했습니다. 오는 29일로 창립 70주년을 맞는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이 노금석 씨와의 인터뷰를 토대로 세 차례의 특집방송을 마련했습니다. ‘노금석의 자유를 향한 비행’. 유미정 기자가 그 첫 번째 편을 전해 드립니다.

59년 전인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날, 소련제 신형 전투기 미그기 조종사인 21살의 노금석 북한 공군 대위는 마침내 일생 일대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본으로부터의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붉은 깃발 아래 소련군이 진주해 수립한 북한의 김일성 공산정권을 떠나 자유세상으로 탈출할 기회가 마침내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지난 13일 VOA 유미정 기자(왼쪽)와 인터뷰 중인 노금석 씨.
지난 13일 VOA 유미정 기자(왼쪽)와 인터뷰 중인 노금석 씨.
넉넉한 집안의 외동 아들로 자라 북한의 엘리트 공군 조종사가 됐던 노금석 씨. 그가 어려서부터 공산주의를 혐오하게 된 것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서구 천주교계 중학교를 졸업한 아버지의 영향이 컸습니다.

[녹취:노금석 씨] “일본 때부터 공산주의 나쁜 것 알았거든요. 공산주의 일본 사람들도 선전 많이 했어요. 제일 나쁜 거라구요… 그래서 저희 아버지는 해방 전부터 벌써 반 공산주의자 였거든요”

북한에서 소련군이 저지르는 만행 역시 공산주의 체제를 탈출하겠다는 노금석 씨의 결심을 굳게 했습니다.

[녹취:노금석 씨] “공산주의 선전하는 게 아주 마음에 안맞거든요. 첫째 종교를 반대하고, 부자들은 전부 나쁜 놈이라고 하고, 미국은 나쁜 나라라고 하구요. 소련이 제일 좋은 나라라고 하구요. 소련 군인들 보니까요, 그거 아주 나쁜 놈들이거든요.

소련에서 죄인들을 전쟁에 보냈거든요… 죄수들 전쟁에 나가면 별짓 다하거든, 강간하고 도둑질하고… 그거 독일에서도 그렇게 하고 한국에서도 …그거 나쁜 놈들이야 미개인이었거든요…”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가 커질수록, 자유세상 미국에 대한 청년 노금석의 동경은 커져만 갔습니다.

학창 시절 영어를 좋아해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노금석 씨는 해방 직후 미국은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와 풍요를 상징하는 나라였다고 말했습니다.

[녹취:노금석 씨] “해방 직후에 내가 미국을 아주 숭배했거든요. 그래서 도서관에 가서 일본 책을 많이 읽었어요. 미국에 대해서 … 미국에 대해 잘 알았거든요. 아 그래 내가 속으로 미국에 가야 되겠다 그런 생각이 나더군요… 제일 강하고 제일 부자고 제일 풍부한 나라가 미국이었거든요… 고기 흔하고 미국 사람들 집이 크고 자동차가 다 있고…”

자유세상 미국에 대한 동경을 새록새록 더해 주었던 것은 태평양 건너에서 전파를 타고 전해지는 ‘미국의 소리’ 방송이었습니다.

[녹취: VOA 방송 이승만 박사 육성]

1942년 한국민에게 해방의 소식을 알리며 한반도에 첫 방송을 송출했던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

라디오로 ‘미국의 소리’ 방송을 듣는 노 씨에게 미국의 파란 하늘은 금방이면 날아갈 수 있는 아주 가까운 곳으로 느껴졌습니다.

[녹취:노금석 씨] “45년도에 해방되니까요, 제일 큰 방송국은 ‘미국의 소리’거든요. 서울 방송국이 낫지만은 사람들이 전부 미국의 소리 방송국을 듣게 했거든요… 그 음악이 참 좋군요... 미국의 음악이 나오고 그 다음에 미국의 소리가 나오고 ..미군 군가인데요…“딴딴딴다 딴다딴다 따다다 딴단다~”그런 거거든요.”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의 김일성은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 할 야욕으로 남한을 침공했습니다. 한반도 상공에서는 제트 전투기의 치열한 공중전이 벌어졌습니다.

미 공군은 당시 공군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새로 등장한 은색의 소련제 비밀 제트기 미그-15는 미군과 유엔군을 위협했습니다.

미군과 싸우기 위해 1백 차례 출격 명령을 받았던 노금석 대위는 미군 전투기 F-18 세이버의 위력이 더 강했다며, 자신이 교전에서 살아남은 것은 행운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노금석 씨] “미그기가 더 높이 올라가거든요, 가벼운 비행기가 돼서 높이 올라가면 F-86 (세이버)가 올라오지 못하거든요. 그런데 내려가면 공중전을 시작하거든요.근데 F-86이 더 빨리 가거든요..음속보다 더 빨리가요. 미그는 음속을 지나 못가거든요. 그래서 미그기가 내려와서 도망가면 미국 비행기가 더 빨리와서 떨구거든요…거의 다칠 뻔 했어요. 총알이 지나가는데..그래서 먼데서 쏘고 그냥 피했죠…

1953년 9월 21일. 여름 장마가 그치기를 바라며 휴전협정 체결 후 두 달 여를 기다리던 노금석 대위는 마침내 남쪽으로 자유를 향한 비행을 단행했습니다.

기체 정비를 마친 후 초계비행 임무를 맡고 순안공항을 이륙한 노금석 대위. 기체번호 2057번의 미그 15기를 이끌고 시속 7천미터의 전 속력으로 청명한 가을 하늘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비행했습니다.

미그기의 좁고 차가운 조종석 아래로 구름이 지나가고, 북한에서 살아온 21년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습니다.

2057번 미그기의 위치를 확인하는 북한 관제탑의 무전 소리가 귓전에 울렸지만, 그는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멀리 휴전선이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노 씨는 59년 전을 회상하면서, 당시 탈출 비행이 성공할 가능성은 20퍼센트에 불과한 것으로 판단했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노금석 씨] “한 20퍼센트 내가 성공하는 줄 알았어요. 80퍼센트 내가 성공 못하는 줄 알았어요. 왜 그러냐하면 미국 비행기가 날 쏘면 내가 뭐라해요, 영어도 못하고, 쏘지 말라 할 수도 없구요. 레이다로 내가 오는 것 알게 되면 또 비행기가 올라와서 쏘고, 두 번째는 고사포를 쏘게 되면 거기 맞으면 비행기가 폭발해서 살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아주 위험했지요.”

하지만 이 날 노금석 씨에게는 또 한 번의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당시 미 공군과 한국 군의 방공 레이더가 수리를 위해 작동이 잠시 중단돼 있어 남하하는 노 씨의 미그기를 탐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바람의 방향 역시 착륙에 악조건을 제공했습니다. 바람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불어 미그기 착륙 속도와 각도가 정상을 벗어나는 바람에, 만일 이 때 이륙하는 비행기가 있었더라면 충돌할 가능성이 매우 컸습니다.

자유를 향한 18분의 비행 끝에 노금석 대위는 한국의 김포 비행장에 안착했습니다. 그는 조종석에서 나오자마자 조종석에 부착됐던 김일성의 사진을 떼어 바닥에 내던졌습니다.

[녹취:노금석 씨] “죽을 것 각오하고 도망했어요…죽는 거 근심하면 도망 못해요…. 죽어도 간다하면 그래서 갔거든요.”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와 자유세계에 대한 끝없는 갈망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북한을 탈출했다는 노금석 씨. 그에게 공산 치하에서의 삶은 죽음보다 싫었습니다.

진행자) 미국의 소리 방송이 창립 70주년을 맞아 보내 드리는 특집방송, ‘노금석의 자유를 향한 비행.’ 내일 이 시간에 두 번 째 편이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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