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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평화시 최장기 경제 붐을 일으킨 대통령, 빌 클린턴


[인물 아메리카] 평화시 최장기 경제 붐을 일으킨 대통령, 빌 클린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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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에는 미국 제 42대 대통령 윌리엄 제퍼슨 클린턴, 약칭 빌 클린턴 대통령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빌 클린턴은 1992년에 대통령에 당선됐고, 1996년에 재선됐습니다. 여러 면에서 클린턴 대통령은 성공적인 대통령이었다고 역사가들은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이후 2차 임기를 끝까지 수행한 첫 민주당 대통령이었습니다. 재임중 경제는 활성화됐고, 나라는 대체로 평화로웠습니다. 그러한 클린턴 대통령도 어려움은 있었습니다. 그는 전국적인 건강보험 정책을 추진했지만 의회를 설득하는데는 실패했습니다.

이 시간에는 미국 제 42대 대통령 윌리엄 제퍼슨 클린턴, 약칭 빌 클린턴 대통령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빌 클린턴은 1992년에 대통령에 당선됐고, 1996년에 재선됐습니다. 여러 면에서 클린턴 대통령은 성공적인 대통령이었다고 역사가들은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이후 2차 임기를 끝까지 수행한 첫 민주당 대통령이었습니다. 재임중 경제는 활성화됐고, 나라는 대체로 평화로웠습니다. 그러한 클린턴 대통령도 어려움은 있었습니다. 그는 전국적인 건강보험 정책을 추진했지만 의회를 설득하는데는 실패했습니다. 2차 임기 중에는 하원에서 그에 대한 탄핵안이 통과되는 등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도 그는 높은 인기도를 누리며 2차 임기를 마칠수 있었습니다.

빌 클린턴은 1946년 미국 남부 아칸소 주 호프(Hope) 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생부인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드 2세는 빌이 태어나기 3개월전 교통사고로 숨졌습니다. 어린 시절 빌은 대부분을 할머니와 어머니 손에 자랐습니다. 어머니 버지니아 캐시디는 자동차 판매상 로저 클린턴 시니어와 재혼했습니다. 계부는 술을 많이 마셨고 자주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빌 클린턴은 그런 계부로부터 어머니와 이부 동생, 즉 아버지가 다른 동생을 보호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가족이 살던 지역들도 가난한 우범지대였습니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그였지만 어린 시절의 빌 클린턴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가 대단히 머리가 좋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음악에도 소질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살면서도 어머니는 종종 아들에게 ‘너는 커서 대통령이 될거야’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어머니의 말대로 빌은 장차 정치인이 되기 위한 활동들을 많이 하며 자랐습니다. 클린턴은 고등학교에 다니던 17살때 각 지역 우수 고등학생 그룹으로 선발돼 백악관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단 몇초간의 짧은 대면이었지만 클린턴은 그 만남으로 자신도 정치인이 되겠다는 희망을 굳혔고 결국 30년 후 대통령이 됐습니다.

그는 워싱턴 디시에 있는 명문 조지타운 대학교에 들어가 국제관계를 공부했습니다. 동시에 여러 학생 단체에 들어가 활동했습니다. 아칸소 상원의원실에서 서기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빌 클린턴은 조지타운 대 재학중 어려운 로드 장학금을 받아 영국 옥스포드 대학으로 가서 공부했고 이어 예일 대학교 로스쿨에 들어갔습니다.

클린턴은 예일 법대에 재학하던 중 미래의 부인이 될 힐라리 로담을 만났습니다. 이들은 1975년 결혼하고 1980년에는 딸 첼시를 낳았습니다. 공부를 마친 클린턴은 1978년 고향인 아칸소주로 돌아와 민주당 소속으로 주 지사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젊은 그였지만 당당히 선거에서 이겨 미국에서 가장 젊은 주 지사가 됐습니다. 그가 주지사로 취임 선서를 한때의 나이는 불과 32세였습니다. 사람들은 젊은 그를 ‘Boy Governor, 즉 소년 지사’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2년 후 치러진 재선 투표에서는 공화당 후보에 패했습니다. 그후 아칸소 주 법이 바뀌어 2년 임기가 4년이 됐습니다. 빌 클리턴은 다시 도전해 승리하고 1983년부터 10년 동안 주 정부를 이끌어 갔습니다. 그는 말 잘하고, 친근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씨를 느끼게 해, 주지사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아칸소 주의 교육정책과 여성, 흑인 등용 정책 등도 호평을 받았습니다. 클린턴 지사는 아칸소 주를 넘어 전국적인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빌 클린턴은 1992년 신 자유주의 노선의 기치를 들고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습니다.

민주당 대선 후보로 뽑힌 빌 클린턴은 현임 공화당 대통령 조지 H.W. 부시와 본선에서 대결했습니다. 두 호보는 또 로스 페로라는 강력한 제 3 후보의 도전에도 직면했습니다. 빌 클린턴은 너무 젊었고,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거기에다 부인이 아닌 다른 여성과 관계가 있다는 보도가 악재로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는 예비선거에서 선전했습니다.

클린턴 선거운동 본부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가장 큰 관심을 두는 경제 개선 문제를 집중적으로 공략했습니다. 선거에서 클린턴이 얻은 유권자의 지지율은 50%도 못됐습니다. 그러나 3파전의 선거였기 때문에 선거인단 수에서 클린턴 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되기 충분한 표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클린턴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재기하는 능력이 있는 정치인으로

부각됐습니다. 언론들은 클린턴을 ‘역전의 인물’이라는 뜻으로 Comeback Kid라고 표현했습니다.

빌 클린턴은 1993년 1월 20일 제 42대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취임하고 나서 클린턴은 즉각 여러가지 경제정책의 수정을 단행했습니다. 여기에는 부자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고, 정부의 지출을 줄이며, 저속득층 지원 정책을 강화했습니다. 불과 한 두해 후 미국 정부의 예산 적자가 사라지고, 연방정부의 자금 상황은 흑자가 됐습니다. 국가의 재정상황은 강력하고 건실했습니다.

클린턴 대통령이 첫 임기 초 추진했던 또 하나의 개혁은 전국민 건강보험 제도였습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민간 보험회사의 건강보험을 들고 있었고, 돈이 없는 사람들은 의료비를 감당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건강보험이 없는 미국인들에게 정부가 어떤 지원을 해줄 수 있는지 그 대책을 찾으려 애썼습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부인 힐라리 클린턴 여사를 건강보험 개혁안을 구상하는 책임을 맡겼습니다. 변호사인 힐라리 클린턴 여사는 남편이 아칸소 주 지사로 재임하는 동안 주 교육 개혁안을 마련한 경험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의회의 여러 의원들과 일부 유권자들은 힐라리 여사의 개혁안을 수용하지 않았고, 결국 건강보험 개혁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임기초 외교관계에서 난관에 직면했던 클린턴 대통령은 후기에 들어 아이티의 민주정부 복귀, 보스니아와 아이렌랜드의 평화협정 체결, 코소보 사태 진화 등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세계의 인권보호와 평화를 유지하는데 미국이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것들을 해결하는데 너무 많은 미국 자원을 사용하는 것은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나라와 협력해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길을 모색했습니다.

그러나 민주 공화 모두로부터 비판을 받은 사건들도 있었습니다. 클린턴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그가 부당한 행동으로 임기 내내 조사를 받는데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는 점에 유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연방 사법당국은 케네스 스타 특별검사를 임명하고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의 투자가 법에 저촉된 것인지를 집중 조사하도록 했습니다.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특별 검사는 대통령이 백악관의 한 젊은 여성 직원과 부적절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사건을 조사한 스타 검사는 클린턴 대통령이 그 여성과의 관계에서 허위 진술을 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대통령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실대로 말하지 않도록 다른 사람들을 단속하려 했다고도 밝혔습니다. 결국 클린턴 대통령은 그 여성과의 관계를 시인했고, 가족과 국민들에게 사과했습니다. 연방 하원은 클린턴 대통령의 탄핵안을 가결했습니다. 그러나 상원의 다수 의원들은 클린턴 대통령의 행위가 국가에 위해를 가할 만큼의 심각한 수준은 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클린턴 대통령에 대한 기소를 기각하고 대통령 직을 계속 수행할 수 있도록 할 것을 표결로 결정했습니다.

많은 미국인들은 클린턴의 백악관 재임기는 양호와 불량이 혼합된 경험을 한 시기인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경제는 미국 역사상 최고의 강세를 구가했습니다. 고용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습니다. 처음으로 내집을 장만하는 미국인 수도 기록적이었습니다. 특히 1990년대 중반 인터넷의 등장을 비롯한 기술 현신은 많은 분야에 붐을 일으켰습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뛰어난 언변을 갖고 있는데다 자신의 소속 정당인 민주당에 새로운 집단의 지지를 끌어내는데도 기여했습니다. 많은 유권자들은 클린턴 대통령이 자신의 행정부

요직에 여성과 소수민족 출신자들을 다수 등용한데 높은 점수를 주었습니다. 미국인들은 그의 총기금지 대책, 환경보호, 근로자들과 그 가족에 어려움이 있을 때 더 나은 휴가를 주도록 한 조치 등을 환영했습니다.

2001년 1월 백악관을 떠난 클린턴 대통령은 부인과 함께 뉴욕시 외곽에 있는 도시에서 살았습니다. 부인 힐라리 크린턴 여사는 뉴욕주를 선거구로 하는 연방상원의원으로 당선됐습니다. 국무장관으로도 일했습니다. 또한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기도 했습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재임 중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초청을 받고 평양 방문을 희망했지만, 시기적으로 임기 만료가 불과 6주밖에 남지 않은데다 중동 평화협정 체결이 예정돼 있어 방북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퇴임후인 2009년 8월에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폭넓은 의견을 교환하고, 억류중이던 미국 여기자 유나리와 로라링을 대동하고 돌아왔습니다.

다른 전임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클린턴 대통령도 자신의 경험을 담은 저서들을 내놓았습니다. 대통령 도서관 건립에도 힘을 보탰습니다. 그는 가족이 설립한 클린턴 기금, Clinton Foundation을 통해 인도주의 지원, 건강, 경제 문제 해결 등에도 지원을 했습니다.

이제 80대를 앞두고 있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건강이상으로 병원 출입도 하며 지내지만, 사람은 누구나 해야 할 일이 있다며, 자신도 할 수 있는 좋은 일을 더 오래 계속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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