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노동당 규약서 ‘통일’ 삭제…미 전문가들 “대화·협력 통한 통일 노선 완전 폐기”

북한 평양에서 개최된 노동당 중앙위 전원회의 확대회의 모습 (자료사진)

북한이 최고 규범인 노동당 규약에서 ‘통일’과 ‘민족’ 관련 표현을 모두 삭제하고 전시 대비 조항을 처음으로 신설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남북 대화와 협력에 기초한 통일 노선을 폐기하고, 한국을 별개의 국가로 다루는 장기 전략을 당의 공식 노선으로 제도화한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조상진 기자가 보도합니다.

북한의 ‘두 국가’ 노선이 노동당의 최고 규범에까지 반영되면서 단순한 정치적 수사를 넘어 되돌리기 어려운 장기 정책으로 굳어졌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한국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은 3일 지난 2월 제9차 노동당 대회 개정 사항까지 반영된 당 규약 전문을 공개했습니다.

개정 규약에서는 기존 서문에 있던 ‘조국의 평화통일’과 ‘통일전선’, ‘남조선’, ‘민족대단결’ 등 통일과 민족 관련 표현이 모두 삭제됐습니다.

‘남조선에서 미제의 침략 무력을 철거한다’거나 미국의 정치·군사적 지배를 청산한다는 대남 혁명 노선 관련 문구도 사라졌습니다.

다만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남북관계를 설명할 때 사용해 온 ‘적대적 국가’나 ‘교전국 관계’라는 표현은 규약에 직접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은 통일과 민족 관련 표현이 김 위원장의 ‘적대적 두 국가’ 선언 이후인 2024년 6월 당 규약 개정 때 삭제됐으며, 이번 제9차 당대회 개정 규약에도 삭제된 상태로 유지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에반스 리비어 전 국무부 동아태 담당 수석부차관보

에반스 리비어 전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수석부차관보는 3일 VOA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번 개정의 의미에 대해 “오랫동안 진행돼 온 흐름에 커다란 마침표를 찍은 것이며, 노동당의 공식 승인 도장을 찍은 것”이라며, 북한의 두 국가론은 정치적 수사가 아닌 현실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에반스 리비어 / 전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 수석부차관보
“I've never regarded it as political rhetoric. This is basically a large exclamation point that's been attached to something that's been unfolding for quite some time. It puts the party's seal of approval on things.”

리비어 전 수석부차관보는 두 국가론이 이제 김정은 개인의 선언이나 국가 정책을 넘어 북한 주민들이 따라야 할 당의 공식 노선이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북한이 이 노선을 다시 되돌릴 가능성도 매우 낮다고 진단하면서 “당과 지도자가 북한을 이끌 새 방향임을 국내외에 단호하게 강조한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리비어 전 수석부차관보는 북한이 폐기한 것은 남북한의 대화와 협력에 기초한 평화적 통일 방식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반면 핵과 미사일, 재래식 군사력을 이용해 한국을 압박하고 미한동맹을 약화하려는 목표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에반스 리비어 / 전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 수석부차관보
“North Korea is not building its nuclear and missile and conventional arsenal for nothing. It seeks domination on the Korean Peninsula. It seeks to weaken the U.S.-ROK alliance and relationship.”

리비어 전 수석부차관보는 북한이 남북 대화와 협력에 기초한 평화적 통일 방식을 폐기했지만, 자신들의 방식으로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목표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북한이 핵과 미사일, 재래식 전력을 아무런 목적 없이 구축하는 것이 아니며, 북한은 한반도 지배를 추구하며 미한동맹과 미한관계를 약화하려 하고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아울러 북한이 한국과의 대화에서는 더 이상 가치를 찾지 못하지만 미국과의 대화 가능성은 열어두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시드니 사일러 전 미 국가정보위원회(NIC) 북한담당 국가정보분석관

시드니 사일러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 한국석좌 비상근 선임고문은 통일 관련 표현의 삭제가 김 위원장의 기존 선언을 규약에 반영한 것인 만큼 새로운 전술적 변화로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밝혔습니다.

다만 김 위원장의 대남 노선이 북한 주민들이 접하는 선전과 교육, 당의 공식 문건에 일관되게 반영됐다는 점에서 제도적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개정 당 규약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업적을 구체적으로 찬양하던 내용도 대폭 삭제됐습니다.

‘김일성·김정일주의’라는 명칭은 유지됐지만 이를 설명하는 문구와 ‘위대한 수령들을 영원히 높이 모신다’는 표현 등은 빠졌습니다.

반면 기존 규약에서 당의 수반으로만 규정됐던 총비서의 권한은 회의 소집권과 간부 임면권, 당원 출당권, 당 부서 해산권 등으로 구체화됐습니다.

사일러 선임고문은 이번 개정이 실제 권력 구조와 김정은의 통치 방식을 규약에 더욱 분명하게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시드니 사일러 /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 한국석좌 비상근 선임고문
“Tightening up some of the language in the charter to shift an emphasis, for example, from the accomplishments of Kim Il Sung and Kim Jong Il to Kim Jong Un, or strengthening specifics on rules and responsibilities of what the General Secretary can do, or what Kim Jong Un can do.”

“규약의 표현을 정비해 김일성과 김정일의 업적에서 김정은으로 강조점을 옮기고, 총비서 또는 김정은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과 책임을 더욱 구체화한 것”이라는 겁니다.

사일러 선임고문은 김정은 집권 이후 당과 국가 기구가 다시 제도적으로 강화돼 왔다며, 이번 개정이 김정은 개인에게 집중된 실제 권력을 당 규약에 명문화하는 과정의 정점일 수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도 이번 개정이 선대 지도자 중심의 정통성에서 벗어나 김정은의 독자적 지위와 유일 영도 체계를 제도적으로 완성한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다만 김정은의 권한을 구체화한 것이 딸 김주애 등 후계자에게 권력을 넘기기 위한 직접적인 조치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사일러 선임고문은 새 당 규약이 후계 절차를 앞당기거나 특정 인물의 승계를 지원하도록 설계됐다고 볼 근거는 부족하며, 현재로서는 추측의 영역이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이번 규약에는 전시에 당 중앙과 지방의 지도기관이 선거 없이 기존 기능을 계속 수행하도록 하는 등 전시 대비 조항도 처음으로 신설됐습니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은 이를 국가 위기 상황에서도 당 조직의 지휘와 통제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로 평가했습니다.

사일러 선임고문은 북한의 러시아 전쟁 지원과 군수물자 생산, 한국을 적대국으로 규정한 강경한 언사를 고려할 때 전시 관련 조항이 새로 들어간 것은 중요한 신호라고 밝혔습니다.

이어 전시 조항 신설에는 북한이 자신을 항상 전쟁 중인 국가가 아니라 일정한 규칙과 제도를 갖춘 핵보유국으로 보이려는 의도도 반영됐을 수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시드니 사일러 /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 한국석좌 비상근 선임고문
“If North Korea is trying to seek to normalize its existence, to portray itself as a normal, more or less rules-abiding nuclear state, maybe it wants to walk away from giving the perception that right now they’re in some type of state of war.”

“북한이 자신의 존재를 정상화하고 스스로를 어느 정도 규칙을 준수하는 정상적인 핵보유국으로 보이려 한다면, 현재 일종의 전쟁 상태에 있다는 인상에서 벗어나려는 것일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사일러 선임고문은 북한이 오랫동안 정전 상태와 외부 위협을 내세워 주민들에게 전시와 같은 동원 태세를 요구해 온 군사주의 사회라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전시 조항은 김정은이 주민과 당 조직에 전시적 사고방식과 대비 태세를 요구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한편, 개정 규약은 이 밖에도 당 건설을 정치와 조직, 사상, 규율, 작풍 등 5개 분야로 구체화하고 노동당 입당 가능 연령을 18세에서 20세로 높였습니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은 이번 규약 개정을 통해 통일 노선 폐기와 김정은의 권한 강화, 전시 지휘 체계 정비가 함께 이뤄졌다며 북한이 이른바 ‘김정은 시대 2.0’의 통치 규범을 제도화한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VOA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