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사는 게 자랑이 되는 시대, 미국의 '언더컨섬션'

미국에서 '적게 소비하기', 일명 '언더컨섬션(Underconsumption)'이 새로운 유행으로 확산하고 있다.

진행자: 미국의 혁신, 문화, 그리고 미국 50개 주 소개까지, 미국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 전해드리는 '구석구석 USA', 오늘은 '미국의 현재' 시간입니다. 오늘도 조상진 기자와 함께 합니다. 오늘은 어떤 내용 준비돼 있나요?

기자) 오늘 다뤄볼 주제는 '언더컨섬션(Underconsumption)', 한국어로 옮기면 '적게 소비하기' 정도가 되겠습니다. 얼마 전 이 코너에서 새 물건 대신 스스로에게 작은 선물을 하는 '리틀 트릿' 문화를 소개해 드렸는데요, 오늘은 정반대 흐름입니다. 아예 사지 않는 것 자체를 소셜미디어에 자랑하는 문화가 미국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해서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진행자) 요즘 소셜미디어 보면 광고가 참 많던데, 안 사는 걸 자랑하는 문화가 유행한다니 다소 의외네요. 예전에는 반대로 산 물건을 잔뜩 보여주는 영상을 공유하는 게 유행하지 않았나요?

기자) 그렇습니다. 이른바 '하울(Haul)' 영상인데요, 쇼핑백 한가득 새 옷이나 화장품을 사 와서 하나하나 풀어보며 자랑하는 ‘언박싱’ 콘텐츠가 한동안 소셜미디어를 지배했습니다. 그런데 2024년 여름, 미국 젊은 층에게 인기 있는 소셜미디어 ‘틱톡’을 중심으로 정반대 콘텐츠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몇 년째 신고 있는 낡은 운동화, 바닥까지 긁어 쓴 화장품 통, 액정에 금이 간 휴대전화를 보여주면서 "이거 아직 멀쩡한데 왜 새로 사?"라고 되묻는 영상들인데요, 이 흐름에는 '언더컨섬션 코어(Underconsumption Core)'라는 이름이 붙었고, 관련 게시물이 수천만 건 넘게 올라올 정도로 빠르게 확산했습니다.

진행자) 사실 이렇게 물건을 아끼고 덜 사는 걸 미덕으로 여기는 정서, 미국에서는 좀 낯설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기자) 그럴 만합니다. 미국은 오랫동안 '부유함을 과시하는 소비'가 자연스러운 사회였는데요, 백 년도 더 전인 1899년,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이 '유한계급론'이라는 책에서 이런 현상에 '과시 소비'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소비한다는 개념인데요, 소셜미디어 시대에 들어서는 이 과시적 소비가 '하울' 영상이라는 형태로 극대화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정반대로, '안 산다는 것' 자체가 보여주기, 즉 과시의 대상이 된 셈입니다. 과시의 방향이 완전히 뒤집힌 겁니다.

진행자) 갑자기 이런 정반대 흐름이 나온 이유가 뭘까요?

기자) 몇 가지가 겹쳐 있습니다. 먼저 물가 부담인데요, 한 시장분석기관 조사를 보면 최근 20여 년 사이 미국의 물가 상승폭이 같은 기간 소득 상승폭을 훨씬 웃돈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씀씀이를 줄일 수밖에 없는 구조적 배경이 있는 셈입니다. 여기에 최근에는 관세로 인한 물가 상승 우려까지 겹치면서, 안 그래도 위축된 소비 심리를 더 얼어붙게 만들고 있습니다.

진행자) 아무래도 물가가 전 세계적으로 많이 오르다보니까 소비 심리가 위축될 수 밖에 없기도 하겠죠. 이 외에 다른 이유는 없을까요?

기자) 또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물가 부담 못지않게 '인플루언서 피로감'을 꼽습니다. 한 재무 전문가는 언론 인터뷰에서, 일상 모든 순간이 무언가를 팔려는 광고처럼 느껴지고 그 가격마저 계속 오르다 보니, 결국 사람들이 소비 자체에 지쳐버린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실제로 이 흐름은 2023년부터 나타난 '디인플루언싱(Deinfluencing)', 그러니까 유행하는 제품을 사지 말라고 권하는 콘텐츠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한 것으로 분석됩니다. 여기에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도 배경으로 꼽히는데요, 한 설문조사에서는 미국 Z세대 상당수가 앞으로 더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소비하고 싶다고 답하기도 했습니다.

진행자) 이런 흐름이 올해 들어서는 아예 '노바이' 같은 구체적인 행동으로도 이어지고 있다고요?

기자) 그렇습니다. 올해는 아예 '언더컨섬션의 해', '노바이(No-Buy)의 해'로 불릴 정도인데요, 일정 기간 동안 생필품이 아닌 물건은 아예 사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노바이' 챌린지가 온라인 상에서 확산했습니다. 화장품을 끝까지, 그러니까 용기 바닥이 보일 때까지 쓰자는 취지의 '프로젝트 팬(Project Pan)'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데요, 적지 않은 미국인들이 이런 챌린지에 동참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관련 검색어인 '소비 안 하기 챌린지'의 구글 검색량도 최근 사상 최고 수준까지 올라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진행자) 이게 단순히 소셜미디어 유행에 그치지 않고, 실제 소비 시장에도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기자) 그렇습니다. 대표적인 게 중고거래, 이른바 '리세일' 시장입니다. 온라인 중고 의류 플랫폼 스레드업의 최근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미국 중고 의류 시장 성장 속도가 전체 의류 시장보다 몇 배는 더 빨랐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파타고니아 같은 아웃도어 브랜드는 물론 일부 명품 브랜드까지 자체 중고 거래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시작했는데요, 업계에서는 소비자들이 관세로 인한 가격 인상 부담을 피하려고 중고 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습니다. 특히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가 이런 중고 시장 성장을 이끄는 주축으로 꼽힙니다.

VOA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