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아메리카 250] 노예제 폐지 운동가이자 연설가, 프레더릭 더글라스

노예 출신의 흑인 인권운동가 프레더릭 더글라스.

진행자: 미국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건국 250주년 관련 소식 전해드리는 ‘역사 속 아메리카 250’, 김미옥 기자와 함께합니다.

기자: 미국 사회를 바꾼 혁신가 가운데는 국가를 이끈 대통령도 있고, 세상을 바꾼 발명가도 있습니다. 또 글을 배우는 것조차 금지됐던 노예로 태어나 미국을 움직이는 위대한 연설가가 된 인물도 있는데요, 오늘은 노예 출신의 흑인 인권운동가 프레더릭 더글라스 이야기 전해드리겠습니다.

진행자: 글도 배우기 힘든 노예가 어떻게 미국을 대표하는 연설가가 될 수 있었는지 궁금한데요, 어떤 인물이었는지 소개해 주시죠.

기자: 프레더릭 더글라스라는 이름은 낯설어도 사진은 한 번쯤 보셨을 겁니다. 현재 확인된 사진만 160장 이상인데요, 19세기 미국에서 가장 많이 사진이 남아 있는 인물 가운데 한 명 입니다. 더글러스는 흑인을 열등하게 보던 사회적 편견에 맞서기 위해 사진을 적극 활용했습니다. 사진 찍을 때 거의 웃지 않았고, ‘이것이 흑인 남성의 모습이다’며 늘 정장을 차려입고 당당하고 강렬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했습니다.

진행자: 흑인도 백인과 동등한 품격과 존엄을 지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사진으로도 보여주려 한 거군요.

기자: 그렇습니다. 프레더릭 더글러스는1818년 2월, 메릴랜드주의 한 농장에서 노예로 태어났습니다. 원래 이름은 프레더릭 베일리(Frederick Bailey)였고, 어머니는 노예였습니다. 아버지는 백인으로 알려졌지만 누구인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노예 아이들은 보통 부모와 떨어져 자랐는데요, 더글러스도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와 헤어졌고, 출생 기록도 없어 자신의 정확한 생일조차 몰랐습니다. 나중에 스스로 2월 14일을 생일로 정했습니다.

진행자: 생일조차 알 수 없었던 노예 소년이 어떻게 글을 배울 수 있었던 겁니까?

기자: 여덟 살 무렵 볼티모어로 보내졌을 때 주인집 소피아 올드에게 처음 알파벳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소피아 남편은 ‘노예가 글을 배우면 통제할 수 없다’며 화를 냈는데요, 소년 더글러스는 오히려 그 말을 듣고 글이 자유로 가는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더글러스는 거리에서 백인 아이들에게 빵을 나눠주며 글을 배웠고, 신문과 간판을 읽으며 독학했습니다.

진행자: 글을 겨우 배운 이 노예 소년이 흑인 인권운동가가 되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있었습니까?

기자: 네. 열여섯 살 때 노예 조련사로 악명 높던 에드워드 코비(Edward Covey)에게 보내졌습니다. 더글러스는 자서전에 거의 매주 채찍질을 당했다고 기록했는데요, 1834년 8월, 결국 코비에게 맞서 싸웠습니다. 두 시간 가까운 몸싸움 끝에 코비를 제압했는데, 더글러스는 ‘이날 노예가 인간이 되는 순간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진행자: 노예 신분에서는 어떻게 벗어났습니까?

기자: 스무 살이었던 1838년 9월 3일, 더글러스는 목숨을 건 탈출에 나섰습니다. 흑인 선원에게서 빌린 '선원 보호 증명서(Sailor's Protection Papers)'를 들고 선원으로 변장한 채 기차에 올라 뉴욕시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때 자유 흑인 여성 안나 머레이(Anna Murray)가 더글러스의 탈출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더글러스가 자유를 얻은 뒤 두 사람은 결혼해 평생 함께했습니다.

진행자: 전국적인 연설가가 된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기자: 우연히 참석한 노예제 폐지 집회에서 노예 시절 경험을 담담하면서도 강렬한 목소리로 연설한 것이 계기였습니다. 흑인 청년이 웬만한 백인 정치가보다 훨씬 더 유창하고 품격 있는 논리로 자유와 인권을 얘기하자 청중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일부는 ‘저렇게 논리적이고 말을 잘하는 청년이 정말 노예 출신일 리 없다’며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1845년, 더글러스는 부당한 노예 생활을 낱낱이 고발하는 자서전을 출간했습니다. 자서전은 미국과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지지자들이 돈을 모아 더글러스의 법적 자유를 사주면서 완전한 자유인이 됐습니다.

진행자: 도망친 노예신분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면서, 더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겠네요?

기자: 그렇습니다. 1847년에는 뉴욕주 로체스터에서 ‘북극성(The North Star)’이라는 신문을 창간했습니다. ‘북극성’은 탈출한 노예들이 밤하늘의 별을 길잡이 삼아 북쪽 자유주를 찾아갔다고 붙인 이름인데요, 신문에는 ‘진실에는 피부색이 없고, 정의에는 성별이 없으며, 우리는 모두 형제다.’ 이런 문구가 적혔습니다.

진행자: 더글러스의 대표적인 연설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기자: 1852년 7월 5일 뉴욕 로체스터에서 한 ‘노예에게 7월 4일은 무엇인가?’ 라는 연설입니다. 더글러스는 “7월 4일은 당신들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닙니다”라며 자유와 평등을 내세우면서도 노예제를 유지하는 미국 사회의 모순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이 연설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설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진행자: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과도 인연이 있었죠?

기자: 네. 링컨 대통령과 세 번 만났는데요, 1863년 백악관에서 흑인 병사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했고, 링컨 대통령은 더글러스의 의견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또, 1865년 백악관 리셉션에서 경비원들이 입장을 막자 링컨 대통령이 "여기 내 친구 더글러스가 옵니다"라며 직접 그를 맞이한 일화가 유명합니다. 노예로 태어나 미국의 대표적 흑인 인권운동가가 된 더글러스는1895년 2월 20일,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워싱턴 D.C. ‘프레더릭 더글러스 국립역사유적지’에 자택 ‘시더 힐(Cedar Hill)’이 보존돼 있는데요, 서재와 원고, 사진, 개인 소장품 등을 통해 더글러스의 삶을 직접 만나볼 수 있습니다.

진행자: 미국 사회를 바꾼 혁신가이자 흑인 인권운동가, 프레더릭 더글러스 이야기, 김미옥 기자와 함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