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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보도: 북한의 장애인] 2. "장애올림픽 첫 출전, 큰 진전"


북한은 6월18일을 `장애자의 날’로 지정하고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에 대한 배려와 관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장애인들은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한 채 무관심 속에 힘든 나날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은 북한 장애자의 날을 맞아 두 차례에 걸쳐 이들의 삶을 조명해 보는 기획보도를 마련했습니다. 오늘은 북한 장애인 지원의 대모로 꼽히는 한국계 미국인 수 킨슬러, 한국 이름 신영순 선교사의 이야기를 전해 드립니다. 이연철 기자가 보도합니다.

1972년부터 서울에서 선교사로 일하던 한국계 미국인 신영순 선교사가 장애인을 돕는 일에 나서게 된 것은 장애인이 된 막내딸 때문이었습니다.

[녹취: 신영순 선교사] “우리 막내 딸이 정신지체 장애인이예요. 어렸을 때 열감기로 뇌손상을 입어가지고. 제가 한 33년째 남한에서 장애인들을 돕는 일을 했어요”

1979년부터 한국 장애인들을 돕던 신 선교사는 1998년 첫 북한 방문을 계기로 북한의 장애인들에게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는 북한과의 각별한 인연이 한 몫 했습니다. 신 선교사의 시아버지가 1928년부터 1940년까지 평양에서 선교사로 활동했고, 남편인 아더 킨슬러 목사는 1934년 평양에서 태어나 6살까지 살았습니다.

그러나 신영순 선교사가 처음 북한에서 장애인을 돕는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북한에는 장애인이라는 개념조차 없었습니다.

[녹취: 신영순 선교사] “98년에 북한에 가서 여기도 장애인이 있는가 했더니 장애인이 뭐냐고 물어볼 정도로 그 때는 장애인에 대해서 일반 사회에서 알려지지 않고…”

2001년부터 한 해에 네 다섯 번씩 북한을 오가면서 북한의 고아들을 돕는 일을 하던 신 선교사는 2004년에 시아버지의 유산을 씨앗으로 ‘등대복지회’를 설립한 뒤 본격적으로 북한의 장애인들을 도왔습니다.

이 때만 해도 장애인 지원에 대한 북한 당국자들의 인식은 매우 낮은 수준이었다고, 신 선교사는 말했습니다. 건강하고 똑똑한 아이들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 굳이 장애인을 지원하려 한다며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북한의 치부를 드러내려 하는 것 아니냐는 오해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신 선교사가 서울에서 장애인보호작업장을 만들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북한 최초의 장애인 재활센터를 평양에 세우려 했을 때도 북한 당국자들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장애인들이 몰려서 일하는 것이 괜찮은지, 장애인들이 중심이 돼 일하는 곳이 성공할 수 있을지 의문을 표시했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북한 당국자들은 신 선교사의 경험을 믿고 사업을 맡겼고, 2007년 평양에 ‘보통강장애인종합편의’가 문을 열었습니다.

[녹취: 신영순 선교사] “보통강종합편의가 2007년 5월에 개관됐는데, 그 때부터 사회에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알려지고 장애인들이 직업재활하는데 사회에서 떳떳하게 알려지는 위치에 올라갔죠.”

신 선교사는 보통강종합편의가 북한에서 처음으로 장애인 마크를 단 직업재활센터라며, 이 곳의 양복과 미용 기술자들은 북한 최고의 기술자들로 소문이 나 있다고 말했습니다.

신 선교사는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농아와 맹아 학교 등 북한의 특수학교 개보수사업을 지원했고, 이들 학교에 장애인 보호장구와 점자컴퓨터, 점자인쇄기, 농기구 등을 보냈습니다.

또 2010년에는 장애인들이 예술과 체육 활동을 할 수 있는 ‘대동강 장애자문화센터’를 세웠습니다.

이런 사이에 북한에서도 2011년부터 장애인 정책에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났다고, 신 선교사는 말했습니다.

[녹취: 신영순 선교사] “작년 4월부터 북한 전역의 정부기관 안에 장애인 담당자들이 생겼어요. 그리고 전국의 장애자들에 대한 인구조사도 2010년에 끝나서 작년에 1백87만명이라는 집계도 나오고, 그리고 정신지체 이런 것들은 특수학교가 없었는데 첫 번째로 올해 5월2일 날 정신지체특수학교를 개교했어요”

신 선교사는 가장 보람있는 일 가운데 하나로 북한이 올해 여름에 열리는 런던 장애인올림픽에 사상 처음으로 출전할 수 있도록 도운 일을 꼽았습니다.

2007년부터 탁구와 양궁,역도, 마라톤, 배드민턴, 농구 등 5-6가지 종목의 용품을 지원했고, 2006년과 2010년 아시아 장애인체육대회 때는 북한 당국자들을 데려가 북한도 장애인대회에 나와야 한다는 점을 설득한 것이 결실을 맺었다는 것입니다.

북한은 마침내 지난 해 ‘조선장애자체육협회’를 설립한 뒤 장애인
올림픽위원회 준회원국 자격을 받아 올해 장애인올림픽에 나갈 수 있게 됐습니다.

신 선교사는 북한의 장애인 올림픽 선수들이 지난 5월 초 중국에서 전지훈련까지 했다며, 이 것이 장애인들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신영순 선교사] “북한 분들 이야기가 정말 나라 건국 이래 최초로 휠체어를 탄 조국의 장애인들이 출국을 했다는 거죠. 순안공항이 다 눈물바다로 변해가지고, 장애인 6명이 나왔거든요, 실무자 6명하고 12명이 나왔는데…”

그러나, 북한의 장애인 지원은 아직 크게 미흡하다고 신 선교사는 말했습니다. 정부 정책이나 사회적 인식이 조금씩 변하고 있고, 특수학교 건물 개보수도 이뤄지고 있으며, 특수교육 기자재들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아주 기본적인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 선교사는 특히 북한에 장애인 판정을 할 수 있는 시설이 없는 게 가장 큰 문제라며, 따라서 장애인종합복지관이 절대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신영순 선교사] “무슨 장애인이든 장애인 판정을 해야 되잖아요. 사고로 된 사람이 있고 태어날 때부터 기형으로 태어난 사람이 있고, 테어난 후에 병으로 인해 장애인이 된 사람도 있고, 그런 사람을 판정을 해서 당신은 등급이 몇 이다 해야 되는데 북한은 아직 그런 게 안 돼 있어요”

신 선교사는 의료시설과 교육시설, 봉사시설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된 종합복지관이 장애인에 대한 정확한 판정과 치료, 그에 따른 특수교육 등을 통해 북한 장애인 복지센터의 모범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신 선교사는 한국에서 이 같은 복지관을 운영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진척이 빨리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2008년 이후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사업이 전면 중단돼 매우 안타깝다고 말했습니다.

미국 장로교 선교사로서 39년간 남북한의 고아와 장애인들을 위해 헌신해 온 신영순 선교사는 지난 해 남편과 함께 은퇴했지만, 지금도 서울의 대북지원단체인 ‘푸른나무’와 협력해 북한 장애인들을 돕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녹취: 신영순 선교사] “제가 장애자의 엄마로서, 저도 죽고 싶은 장애자 엄마의 고통의 세월을 살아온 사람인데 남한에서 제가 도와준 사람들이 이제 다 결혼해서 아들 딸 낳고 떳떳한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분들이 많아요”

신 선교사는 북한의 장애인들도 한국의 장애인들처럼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표라며, 그런 날이 하루 빨리 돌아오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미국의 소리 이연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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