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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전 북한 김일성 사후 수습 어땠나


김정일 위원장의 갑작스런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서 17년 전 김일성 주석 사망 직후 북한 정권 내부 움직임이 새삼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당시 북한 당국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 나갔는지 백성원 기자가 전해 드립니다.

김일성 주석의 사망이 발표된 시점은 지난 1994년 7월 9일.

미국과 북한은 전날부터 스위스 제네바에서 제 3단계 미-북 고위급 회담을 진행하던 중이었습니다.

“시청자 여러분, 위대한 어버이 수령님을 잃은 가슴아픈 심정들이…”

사망 직후 북한 전역에는 ‘불온분자 색출령’이 하달되고 평양 수도방위사단에는 비상소집명령이 내려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김정일 반대세력이 대두할 가능성을 발빠르게 차단한 겁니다.

같은 날 중국 정부는 김정일 후계체제를 공식 인정하는 내용의 전문을 보내고, 북한 관영방송들은 김 위원장을 추앙하는 방송을 대대적으로 내보냈습니다.

“논문 사회주의는 과학이다를 발표하여 우리는 수령님께서 개척하신…

이틀 뒤인 7월 11일 김 위원장은 북한 관영방송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며 존재감을 과시했습니다. 특히 김 주석이 사망한 이후 사흘 간 김정일은 당과 정치권, 군 내부 주요 인물을 소집해 당정 연합회의를 열고 권력 승계를 승인 받았다는 얘기가 흘러 나왔습니다.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면서 본격적인 김정일 시대가 열렸지만 그는 신중했습니다. 스스로 국가주석이 되지 않고 유훈통치를 선포한 겁니다.

때맞춰 북한 당국은 김일성 영생론을 제시하고 ‘김일성은 곧 김정일이다’라는 연결작업을 시도했습니다. 새로운 정책노선을 제시하는 대신 ‘김일성식’으로 혁명과 건설을 지속하겠다는 공언이었습니다.

당시 북한의 모든 상황은 극도로 열악했습니다. 국가경제와 식량배급제가 붕괴돼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하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통제기능이 마비 직전까지 치달았습니다.

북한은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른바 ‘고난의 행군’을 택했습니다. 이를 위해 김 위원장은 수직적 조직체계를 갖추고 물리적 강제력을 지닌 군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부의 어려운 상황을 돌파하고 정치적 안정을 이루려는 의도로 군을 우대하고 군에 의존하는 군부통치로 북한사회 전반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 나간 겁니다.

북한의 국가체제는 김일성 3주기를 마친1997년 김정일이 총비서직에 추대되면서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고, 1998년 헌법 개정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후 북한은 군부통치를 선군정치로 명명한 뒤 강력한 통치구호로 내세웠습니다. 그러면서 경제적, 외교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나름의 변화를 추구했습니다.

1998년 제10기 최고인민회의는 사회주의 헌법 개정을 통해 경제난 속에서 변화된 사회상을 반영했고, 세대교체를 통해 젊은 기술관료를 내각에 등용하면서 위기 돌파를 시도했습니다.

김 위원장은 이 과정에서 ‘강성대국론’과 ‘신사고론’, ‘실리주의’ 등 새로운 비전을 내놨지만 체제 고수라는 한계에 부딪쳐 실질적 변화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입니다.

반면 북한의 외교 행보는 김일성 주석 사후에도 적극적으로 이어졌습니다. 1994년 북한은 김 주석 사망 3개월 뒤 미국과의 교섭을 재개해 제네바 합의문을 이끌어 냈으며 한국과도 금강산 관광 사업 등 파격적 남북교류를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김일성 주석 사망 직후 제기되던 북한체제의 조기 붕괴 가능성은 점차 주목을 덜 받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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