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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본 미국의 흑인 역사 -  노예 폐지 운동의 선구자 프레데릭 더글라스 - 2005-02-28


미국인들은 [흑인 역사의 달]인 2월에 지난 300여년동안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경험을 형성했던 인물과 장소와 사건들을 되돌아 보았습니다. 이 시간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 19세기의 위대한 노예폐지론자이며, 작가이고 웅변가인 프레데릭 더글라스의 특이한 생애와 업적을 조명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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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태어난 프레데릭 더글러스는 나중에 노예제도의 가장 열렬한 반대자가 됐습니다. 더글러스는 어렸을 때, 어머니와 형제들과 헤어지는 아픔을 겪으면서 이 같은 가족 파괴는 노예제가 계속되도록 허용되기 때문이라고 믿게 됐습니다.

“최근에 와서 나는 종종 사람들에게 만약 이 나라의 국민이 진정으로 노예제의 회복을 원한다면 단순히 모든 가족의 의미를 파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배우인 프레드 모셀은 무대에서 프레데릭 더글러스와 그의 불 같은 웅변을 재연했습니다. 그의 회색의 정장과 나비 넥타이 차림이 그의 장발의 흰머리와 은빛 수염과 잘 어울리는 모셀 씨는 진짜 프레데릭 더글러스와 닮았습니다. 사실, 프레드 모셀은 배우로 교육가로 젊은 미국인들에게 선조의 결연한 비전을 이해시키기 위해 활동하고 있는 더글러스의 직계자손인 프레데릭 더글러스 4세보다 더 할아버지 더글러스의 모습을 빼닮았습니다.

“나의 고조부나 다른 계약노동자와 같은 사람들로부터 얻는 교훈은 노예로 이 나라에 온 것처럼 맨몸으로 노예농장을 떠나 나중에 의사가 되고 변호사가 되고, 지도자들이 됐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지도자들을 보면 전진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핑계를 댈수가 없습니다.”

이 같은 교훈은 워싱턴 DC의 케참 초등학교 학생들을 포함해 모셀 씨와 현대의 웅변가들과 젊은 연기자들이 다시 한번 절실히 깨닫게 해줍니다.

다양한 공연 행사들은 더글러스가 어떻게 읽고 쓰는 법을 배웠는지, 그의 나이 20세때 미국 북부로 탈출해 노예폐지론자와 유명한 웅변가가 됐는지를 보여줍니다. 역사가들은 더글러스가 노예를 해방시키는 것이 남북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에이브라함 링컨 대통령을 설득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프레데릭 더글러스는 또한 흑인들처럼 초창기 미국 헌법에서 투표권을 거부당했던 여성의 권리보장을 위한 여권운동의 지도자이기도 했습니다. 더글러스 씨는 여성 투표권 획득운동에서 보인 고조부 더글러스의 역할은 별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면서 이것을 바꾸어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많이 있습니다. 내 아내와 나는 노예폐지운동에서 보인 고조 할머니의 역할에 관해서 알리기 위해 전국을 여행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역사에 관해서 가르치려고 하는 모든 것을 가르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요약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프레데릭 더글러스는1845년부터 1848년까지 런던에서 체류했는데 여기서 그는 평등한 인간의 한 사람으로 대우를 받았다고 썼습니다. 더글러스는 언젠가 미국의 모든 흑인들이 자신이 영국에서 받은 것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을 갖게 된 것이 바로 영국에서였다고 말합니다.

영국은 그의 유럽여행에서 기지와 같았습니다. 더글러스는 노예폐지론자로서 뿐만 아니라, 여성 참정권론자로 활동한 국제적인 인물과 또 인류의 인권에 관해 전반적으로 우려를 가졌던 인물로 계속 기억되고 있습니다.

프레데릭 더글러스 4세는 그의 증조부의 생애를 기리는 것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배우고 뒤를 잇도록 고취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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