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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노예제도의 역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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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시간의 부지영입니다. 1492년 10월 12일,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현재 바하마 제도의 한 섬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이 날 콜럼버스의 발견으로 아메리카 대륙은 유럽인들의 활동무대가 되는데요. 이와 함께 흑인 노예들의 비극의 역사 또한 시작됩니다. 16세기 초부터 19세기 중반까지 3백여 년 동안 무려 1천2백만 명 이상의 아프리카 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노예로 끌려왔는데요.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오늘은 대규모 흑인노예 무역이 발전하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면서 비잔틴 제국의 1천년 역사가 막을 내렸다. 비잔틴 제국의 멸망은 유럽인들에게 큰 타격을 안겨줬다. 오스만 제국이 동 지중해를 장악한 가운데 아시아로 가는 교역로가 막혀버린 것이다. 이미 후추 같은 동방의 향신료에 흠뻑 빠져있던 유럽의 여러 나라는 새로운 무역로를 찾아 나섰다.”

네, 새로운 항로 개척에 있어서 처음 앞서간 것은 포르투갈이었습니다. 15세기 들어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탐험을 시작한 포르투갈은 서아프리카와 교역을 시작하는데요. 아프리카 인들을 데려다 유럽에 노예로 팔기도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스페인 왕실의 지원을 받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것입니다. 서포크 대학교 역사학과 로버트 앨리슨 교수입니다.

//앨리슨 교수//
“스페인 사람들 역시 아시아로 통하는 길을 찾고 있었는데요. 스페인은 서쪽으로 항해해서 아메리카 대륙에 이르렀습니다. 처음에는 신대륙에서 황금을 캐내는데 초점을 맞췄죠. 그런데 금은 생각했던 것만큼 많이 나오지 않았고요. 그보다는 카리브 해 여러 섬에서 사탕수수와 담배를 재배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때까지 담배는 유럽이나 아시아에 알려지지 않았었는데요. 스페인이 아메리카에서 발견해 유럽에 소개하면서 금방 인기 상품으로 떠오릅니다. 서유럽의 여러 나라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앞다퉈 식민지 개척에 나서는데요. 사탕수수나 커피, 담배, 목화, 염료로 쓰이는 인디고 등 유럽에서 생산하기 힘든 것들을 식민지에서 생산해 본국에 공급을 했고요. 이렇게 식민지 농장이 발달하면서 노예가 필요하게 됐습니다.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 그린스보로 대학교 역사학과 로렌 슈웨니거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시죠.

//슈웨니거 교수//
“콜럼버스 일행이나 카리브 해 섬의 스페인 이주자들은 처음에 섬의 원주민들을 노예로 부리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원주민들은 힘든 노동을 잘 견뎌내지 못하고 다들 죽었습니다. 그런데 1517년에 히스패니올라 섬을 방문한 가톨릭 주교가 있었어요. 히스패니올라 섬은 현재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이 있는 섬인데요. 이 가톨릭 주교가 와서 보니까요. 원주민들은 수천 명씩 죽어가지만 서아프리카 인들은 살아남는 거에요. 그래서 당시 스페인 왕이던 카를로스 5세에게 아프리카 인들을 노예로 데려오는 걸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죠. 카를로스 5세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1520년대 이후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카리브 해 섬의 농장에 끌려왔습니다.”

이들 아프리카 인들은 말라리아나 황열 같은 전염병에 대한 저항력도 원주민 인디언들에 비해 훨씬 강했습니다. 힘든 일을 잘 견뎠을 뿐 아니라, 도주가 불가능하다는 이점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대서양의 흑인노예 무역은 1500년대 들어서 본격화됐는데요. 1600년대 초에 이르러서는 노예선이 서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유럽 식민지 사이를 정기적으로 오가게 됩니다.

//앨리슨 교수//
“1500년대에서 1800년대 중반까지 적게는 1천2백만 명, 많게는 2천만 명에 달하는 아프리카 인들이 노예로 끌려왔습니다. 그 가운데 49퍼센트는 브라질, 컬럼비아, 베네수엘라, 수리남 등 현재 남미 지역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죠. 42 퍼센트는 자메이카, 바베이도스, 쿠바, 또 현재 도미니카 공화국과 아이티가 있는 섬 등 카리브 해의 여러 섬, 즉 서인도제도에 왔습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이 남미나 카리브 해 섬에 끌려왔고요. 북미 지역에 온 흑인 노예들은 전체의 7 퍼센트 정도였습니다.”

역사학자 로버트 앨리슨 교수의 설명이었습니다. 1500년대에서 1850년까지 흑인 노예들에 대한 수요가 높았던 곳은 남미나 카리브 해 섬들이었다는 건데요. 왜냐하면 사탕수수 농장 때문이었습니다. 설탕은 당시 유럽이 경제적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는데요. 고된 사탕수수 농사를 노예들이 담당했던 겁니다. 원래 노예무역의 선구자는 포르투갈이었는데요. 곧이어 스페인, 네델란드, 프랑스, 영국 등 유럽 여러 나라가 노예무역에 뛰어들었습니다. 하지만 1750년대에 이르자 노예무역은 영국이 장악하게 됩니다.

//앨리슨 교수//
“영국은 자메이카와 바베이도스 등 카리브 해 섬의 식민지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예가 필요했습니다. 영국이 다른 식민지 열강에 비해 유리했던 점은 북아메리카, 그러니까 북미 지역에도 식민지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목재 등 선박 제조에 필요한 원자재가 북미 지역에 풍부했거든요. 그러니까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에서 배를 제조하고, 또 식민지 주민들을 선원으로 고용했던 겁니다.”

또한 식민지 시대 미국은 노예들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대는 역할도 담당했습니다. 서포크 대학교 로버트 앨리슨 교수입니다.

//앨리슨 교수//
“지금의 매사추셋츠 주, 메인 주가 있는 미국 북동부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생선의 한 종류인 대구가 많이 잡혔는데요. 대구는 서인도 제도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들의 주 식량이 됐죠. 한번 농장 주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세요. 사탕수수 재배로 얻는 이익이 어마어마한데 농사 지을 땅은 한정돼 있다면, 노예들 먹을 식량을 생산한다고 아까운 땅을 낭비하진 않을 겁니다. 다른 데서 식량을 사오는 게 더 싸게 드니까 말이죠. 이렇게 여러 가지 유리한 점이 많았기 때문에 영국이 노예무역을 장악하게 됐습니다.”

이 같은 과정에서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삼각무역이 발달했습니다. 영국에서 떠난 배가 서아프리카에 들러 노예를 사들인 뒤 아메리카와 카리브 해의 사탕수수 농장에 노예들을 팔고, 이들이 재배한 사탕수수를 가공해 설탕을 만들어 유럽에 가져가서 판 것인데요. 아프리카 흑인 노예에 대한 수요가 점점 늘어나는 가운데, 서아프리카 부족의 왕들은 전쟁포로나 이웃 마을에서 납치한 주민들을 유럽인들에게 노예로 팔았습니다. 역사학자 로렌 슈웨니거 교수입니다.

//슈웨니거 교수//
“노예들을 줄줄이 세워서, 목에 나무로 만든 족쇄 같은 것을 채워서 해안으로 데려왔습니다. 해안에 도착하면 나무로 된 우리에 가둬두는데요. 우리에 갇혀있는 기간이 며칠이 될 수도 있고, 몇 주, 때로는 몇 달이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노예선이 아프리카 항구에 도착하면 아프리카 부족의 왕들과 거래를 해서 노예를 사들이죠. 노예들은 건장한 남자가 대부분이었지만 여자나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노예들이 아프리카 어느 해안 출신인지 표시하기 위해 몸에 낙인을 찍었고요. 그 다음에 배 아래 선창에 몰아넣는데, 한번에 3백 명 내지 4백 명씩 노예를 태웠습니다. 그렇게 배를 꽉 채워서 아메리카로 가는 거죠.”

대서양을 넘어 아메리카로 오는 험난한 바닷길…… 흑인 노예들을 강제 운송하던 이 단계를 중간항해 (Middle Passage)라고 부르는데요. 노예들은 거의 포개진 상태에서 긴 항해를 견뎌야 했습니다.

짧게는 50일, 길게는 수 개월씩 걸리는 중간항해 기간 동안 수 많은 노예들이 목숨을 잃었는데요. 17세기에 지금은 남미 콜럼비아가 된 지역에서 일했던 스페인 신부 알론소 데 산도발은 노예선 관계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중간항해의 비참한 실상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눌리고, 불결하고, 학대 받고…… 노예 호송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노예들은 여섯 명씩 목에 고리가 씌워지고, 두 명씩 발에 족쇄가 채워진 상태에서 배 밑바닥 선창에 갇혔다. 노예들이 갇혀있는 곳에는 햇빛이나 달빛이 전혀 들지 않았고…… 워낙 악취가 심해서 선원들은 잠깐 문을 열고 들여다보기만 해도 구토를 느낄 정도였다. 노예들이 선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한번 주어지는 식사 시간뿐……. 그나마 음식이라곤 옥수수 가루나 조로 쑨 죽 한 사발과 물 한 잔이 전부였다.”

노예들이 병들어서 값이 떨어질 것을 우려한 상인들은 가끔씩 노예들을 갑판으로 끌고 나와 운동을 시키기도 했는데요. 채찍을 휘두르며 강제로 춤을 추게 하는 등 매우 가혹하게 대했습니다. 노예들 중에는 이 같은 고통과 굴욕을 견디다 못해 음식을 거부하거나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경우도 있었고요. 분노한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켜 배를 장악하거나 백인 선원들을 모두 살해하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이름난 전사이자 노예상인인 타망고는 프랑스 국적의 희망호 선장에게 30명 가량의 노예를 팔아 넘겼다. 거래가 이뤄진 걸 기뻐하며 밤새 흠뻑 술에 취했던 타망고는 다음 날 아침 깜짝 놀랐다. 술에 취해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사랑하는 아내인 에이셰까지 팔아 넘긴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분노에 사로잡힌 타망고는 작은 배를 저어 이미 돛을 올린 노예선을 따라잡았다. 하지만 도리어 희망호 선원들에게 사로잡혀 다른 노예들과 함께 선창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아내 에이셰의 도움으로 족쇄를 푸는데 성공한 타망고는 다른 노예들과 모의해 반란을 일으켰다. 백인 선원들을 모두 죽이고 배를 탈취하는데 성공했지만…….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흑인들은 배를 다룰 줄 몰랐던 것이다……. 몇 주일 뒤 근처 해역을 지나던 영국 선박은 돛대가 부러진 채 정처 없이 바다를 떠도는 희망 호를 발견한다. 그 배에는 앙상하게 뼈만 남은 사람이 혼자 남아 있었는데, 바로 타망고였다.” (시공사 ‘흑인노예와 노예상인: 인류 최초의 인종차별’ 중에서)

네, 프랑스 작가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소설 ‘타망고’의 내용입니다. 타망고는 결국 노예로 팔려가 일생을 보내게 되는데요. ‘타망고’는 소설이지만 실제로 중간항해 도중에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가끔 있었습니다. 하지만 반란이 성공하는 경우는 드물었고요. 노예선이 목적지에 도착할 즈음이면 노예들은 모든 희망을 상실한 채,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자세가 돼있었습니다.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오늘은 신대륙이 발견된 후 아프리카 흑인 노예무역이 발달하는 과정을 살펴봤는데요. 서양 노예제도의 역사에 관한 얘기는 다음 시간에도 계속됩니다. 다음 시간도 기대해 주시고요. 지금까지 부지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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