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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한민족의 역사를 바꾼 귀화인들


안녕하세요? 화제가 되는 뉴스를 중심으로 역사를 더듬어가는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시간의 부지영입니다. 얼마 전 독일 출신의 귀화인 이참 씨가 한국관광공사 사장으로 취임해 큰 관심을 모았죠? 이참 씨의 본명은 베른하르트 크반트인데요. 1982년에 한국 여성과 결혼하고 1986년에 귀화하면서 이름을 한국 이름으로 바꿨습니다.

//이참 씨//
“귀화인으로, 외국인 출신으로, 이방인 출신으로 이렇게 고위직에 임명돼 개인적으로도 상당히 감동이 있습니다.”

지금 이참 씨의 소감을 잠시 들어보셨는데요. 이렇게 목소리만 듣고는 순수 한국인인지, 독일계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죠? 이참 씨는 연기자, 방송 진행자로 활동하면서 능숙한 한국어를 구사해, 많은 인기를 모았는데요. 이번에 귀화인 최초로 공기업 사장에 임명됐습니다.

귀화인이 한국의 공기업 사장으로 임명되는 시대, 한국에서 10쌍 중 1쌍은 외국인과 결혼한다는 국제 결혼의 시대를 맞아, 한민족의 역사에서 외국인들의 귀화는 언제 시작됐고, 또 유명한 귀화인들이라면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 궁금한 생각이 드는데요. 그래서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이번 주부터는 한국 역사 속의 귀화인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인데요. 먼저 한반도에 귀화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고, 또 각 시대별로 어떤 사람들이 들어왔는지, 대략적인 내용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도움 말씀에 ‘우리 역사를 바꾼 귀화 성씨’의 저자 박기현 씨입니다.

//텍스트//
“서라벌 밝은 달밤에 밤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다…….”

이런 가사로 시작되는 처용가를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처용가는 신라 헌강왕 때 처용랑이 지었다는 향가인데요. 왕이 동해 용을 위해 절을 세우자, 용이 일곱 아들과 함께 나타나 춤을 추었고, 그 가운데 한 아들이 왕을 따라와 정사를 도왔는데, 그 아들이 바로 처용이었다고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습니다. 처용의 아내는 몹시 아름다웠다고 하는데요. 그 아내를 흠모한 역신이 밤에 몰래 들어와 동침했지만, 처용은 이 사실을 알고도 화를 내지 않고, 도리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춰 역신을 감복시켰다고 합니다.

이 처용설화를 바탕으로 한 처용무가 한국은 물론, 북한에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요. 처용무에 사용되는 처용탈을 보면 매우 이국적이란 느낌이 듭니다. 큼직한 코, 짙은 쌍꺼풀, 그리고 앞으로 튀어나온 주걱턱이 한민족의 얼굴과는 매우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는데요.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처용이 아라비아 상인, 아랍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처용이 아랍인이란 설이 사실이라면, 이미 신라 시대에 외국에서 들어와 정착한 귀화인이 존재했다는 얘기인데요. ‘우리 역사를 바꾼 귀화 성 씨’의 저자 박기현 씨는 그 시대 서역과의 교역이 빈번했다는 증거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란 설화를 들었습니다.

//박기현 씨//
“여러 학자들이 주장을 많이 하는데 실크로드의 맨 마지막 종착역이 금성이라고 쓴 신라 경주다, 서라벌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요. 경문왕 얘기는 사실 ‘마이더스의 손’하고 얘기가 거의 비슷합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것도 그리스나 이런 쪽에서 영향을 받아서 실크로드를 거쳐서 여기까지 얘기가 들어왔다는 것은 얘기와 함께 사람도 들어왔다고 봐야 하거든요. 당연히 교류가 있었다고 봐야 되고, 그 대표적인 예가 처용입니다.”

박기현 씨는 삼국시대는 물론이고, 그 이전부터 귀화가 시작됐다고 보는데요. 하지만 당시 외부인들의 정착을 귀화라고 단정짓기엔 무리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과거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쉬웠기 때문인데요. 홍수나 가뭄, 변란을 피해 일시적으로 피신 왔다가 주저앉은 사람들이 많았다고 박기현 씨는 설명했습니다.

“서기 42년 금관가야 9부족의 추장인 9간이 김해구지봉에 모였을 때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합이 내려왔다. 그 안에는 해처럼 둥근 황금알 6개가 들어있었고 반나절 만에 모두 사람으로 변했는데 수로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키가 9척이고 팔자 눈썹이며 얼굴이 용과 같이 생겼는데, 처음으로 사람으로 화했기 때문에 ‘수로’란 이름을 갖게 됐다.”

네, 김해 김 씨의 시조 김수로 왕에 관한 설화인데요. 6개 알 중에서 제일 먼저 사람으로 변했다는 김수로 왕은 9간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고, 가락국의 시조가 됐습니다.

//박기현 씨//
“사실 서기 1세기에 알에서 태어나는 인류가 있을 수 있습니까? 불가능하잖아요? 그 이전을 추적하지 못해서 나오는 얘기거든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도 어디선가 왔을 거 아니에요? 비록 토착민이라고 할 지라도…… 그 사람들이 아마 흉노족의 김일제 후손으로 넘어온 사람이 아니냐, 그렇게 보고 있는 거죠.”

이 같은 설은 아직 학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만, 실제로 많은 학자들은 문무왕릉비 비문을 인용해, 신라 김씨 왕조의 조상을 흉노족으로 보고 있습니다.

//박기현 씨//
“그런 인물들을 합하면 그 당시에 굉장히 많이 넘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란이 계속돼 왔으니까요. 해주 오 씨 같은 경우도 신라 초기에 넘어왔습니다. 가야사의 최초의 국제결혼이라고 할 수 있는 허황옥,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중국을 거쳐 들어왔다, 뭐 이런 얘기가 있거든요. 그건 거의 정설로 밝혀져 있습니다. 허 씨 같은 경우도 김해 김 씨, 허 씨는 결혼을 안 하잖아요?”

이 같은 귀화인들의 유입은 고려시대에도 계속됐습니다. 고려 초 고려의 기틀을 세웠다고 알려진 쌍기는 후주에서 고려로 귀화한 쌍철의 아들이었는데요. 서기 956년 후주의 사신 설문우를 따라 고려에 왔다가 눌러앉았습니다. 당나라의 관리임용제도를 따라 과거제도를 창설하게 하는 등 광종의 개혁에 기여했는데요. 이처럼 쌍기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고려 조정은 귀화인들에게 관직을 수여하고, 이들이 고려에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집이나 논밭 등을 증여하는 등 여러 가지 특전을 제공했습니다. 이 같이 적극적인 귀화정책에 힘입어, 송나라가 멸망할 당시 많은 유민들이 고려에 들어왔습니다.

//박기현 씨//
“송나라가 멸망할 때 수십만 명이 왔을 것이다 그런 얘기들을 해요. 12세기 중엽부터 시작해서…… 그 때 넘어온 사람 중에 배천 조 씨, 거창 신 씨, 이런 분들이 그 때 넘어온 분들이고요. 그 다음에 국 씨들, 담양 국 씨, 현풍 곽 씨, 달성 하 씨, 이런 분들의 선조들이 그 때 넘어와요.”

“서기 918년 태조 왕건이 세운 나라 고려……. 궁예의 후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신라와 후백제를 통합해 936년 한반도를 재통일하는데 성공한다. 거란족 요나라와 여진 족 금나라의 거듭되는 침공을 막아냈고, 13세기 원나라의 공격에 30여 년 동안 항전했지만 1270년 결국 무릎을 꿇고 만다.”

네. 고려는 원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한 후 원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마는데요. 원나라는 고려 왕실의 혈통을 바꾸기 위해 고려 왕자를 원에서 교육시키고, 원나라 공주와 결혼시켰습니다. 당시 고려 왕과 결혼한 원나라 공주들을 따라, 많은 원나라 신하들이 고려에 들어왔습니다.

//박기현 씨//
“원나라 제국대장공주라고 있습니다. 제국대장공주의 배종이라고 하면 몸종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게 아니고, 모시고 있던 부하 장수들이 같이 들어옵니다. 곡산 연 씨, 연안 인 씨 같은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아주 유명한 사람들이고요. 덕수 장 씨, 덕수 장 씨는 지금 굉장히 명문 집안이죠. 위구르 출신이에요, 특히 덕수 장 씨는…… 또 고려 말에 넘어와서 조선의 유명한 학자가 됐던 설장수, 설 씨 집안이 있는데, 그 때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위구르 족인데, 이 사람들도 다……”

그 밖에 공민왕과 결혼한 노국대장공주를 따라 들어온 공소는 곡부 공 씨의 시조가 됐고요. 변안렬은 원주 변 씨의 시조가 됐습니다. 변안렬은 왜구 정벌에도 큰 공을 세우고, 고려 조정에서 최고위직에 올랐는데요. 창왕 1년에 이성계 제거 모의에 연루된 혐의로 처형되는 등 끝까지 고려에 대한 충성을 지켰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기여한 귀화인도 있었습니다.

//박기현 씨//
“이성계하고 의형제를 맺었던 이지란, 그 사람이 여진족의 1천 명 정도 데리고 있는 천부장 정도 역할을 하던 사람인데 들어와서 이성계가 왕으로 일어날 수 있을 만큼 크게 도왔던 장군입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6세기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많은 일본 군과 명나라 군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귀화했습니다.

//박기현 씨//
“제일 많이 움직인 건 역시 임진왜란하고 명나라가 멸망할 때입니다. 임진왜란 때 굉장히 많이 넘어왔어요. 와서 전쟁을 하고 돌아가려고 그럴 때 명나라가 망하거든요. 정유재란 때 명 군을 인솔하고 돌아온 제독 이름이 마귀입니다. 좀 이름이 이상하죠? 마귀 제독인데, 마귀 제독의 증손자가 마순상이란 사람입니다. 이 사람 때 정유재란 때 계속해서 전쟁을 하고 이 사람들이 아예 들어와요, 마 씨가…….”

그 밖에 절강 팽 씨, 소주 가 씨, 농서 이 씨, 광동 진 씨 등이 당시 명 군을 이끌고 들어왔다가 조선에 정착한 사람들의 후손인데요. 김충선과 같이 임진왜란 때 일본 장수들이 귀화하기도 했습니다. 원래 이름이 사야가인 김충선은 조선에 조총 제작 기술을 전수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조선은 고려에 이어 귀화인들에 대한 우대 정책을 유지했지만 조선 말기에는 귀화인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다. 나타나는 기록은 유구국이라 불렸던 오키나와나 청나라, 왜에서 표류해 온 사람들 정도다. 이는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하면서부터 조선과 청의 경계가 명확했기 때문에 중간에 여진이나 여타 다른 부족들을 정책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전혀 없었고, 청나라에서도 오히려 돌려보내라고 요구해, 귀화 자체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어 조선이 문을 굳게 걸어 잠그는 쇄국정책을 펴면서, 단일민족 사상이 심화됐습니다. 하지만 ‘우리 역사를 바꾼 귀화 성씨’의 저자인 박기현 씨는 단일민족이란 개념은 허구라고 주장합니다.

//박기현 씨//
“미국의 경우는 많은 민족이 모여 있지만 다 미국인이잖아요. 어메리칸이잖아요? 한국에서는 외국에서 들어와도 한국인이 되기가 쉽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국가와 민족을 같은 개념으로 봤거든요. 지금 실제로 한반도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지만 북쪽으론 터져 있었어요. 이것이 국경으로 형성이 된 것은 청나라 때입니다. 청나라 때 비로서 책문이란 걸 세우고, 사방에 30리 이상 공터를 세우고, 양 측에 인가를 다 비웠어요. 그 전에는 아무나 다 왔다갔다할 수 있었어요. 그러니 민족의 개념이라고 얘기하기가 참 어렵지 않겠어요? 그 사이에 섞여 있던 사람들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유교사상에 따라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면서 단일민족이란 개념이 나왔을 뿐, 지금까지 들어보셔서 아시겠지만, 수 많은 타민족이 한반도에 정착했고 그 후손을 퍼뜨렸다는 건데요. 다만 피부색이 비슷하기 때문에 쉽게 구별을 못 했을 뿐이란 거죠.

하지만 앞으로는 피부색이 다른 한국인들이 늘어날 전망인데요. 독일계인 이참 씨처럼 한국에 귀화하는 서양인들이 늘고 있고, 필리핀과 방글라데시, 베트남 등에서 수 많은 인력이 들어오면서, 골라낙콘치타, 누그엔 티수안, 남캉캉마 등 외국계 성씨가 한국 호적에 등장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같은 현상이 벌어지는 가운데, 한민족 역사 속의 귀화인들을 돌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되는데요.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다음 시간에는 화산 이씨의 시조인 베트남계 귀화인 이용상에 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도 기대해 주시고요. 저는 여기서 물러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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