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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일 관계, 핵/납치 문제로 여전히 경색


북한과 일본은 지난 1991년 국교 정상화 협상을 시작했지만 20년이 다 돼 가는 지금까지도 전혀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핵심쟁점인 북한 핵 문제와 일본인 납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기 때문인데요, 이연철 기자가 지금까지의 북-일 관계를 정리했습니다.

북한과 일본 두 나라는 1950년대 중반에 간접교역 형식의 경제 교류를 시작했습니다. 이 때부터 양측 간에 국교 정상화 문제가 거론됐지만 실질적인 논의가 이뤄지지는 못했습니다.

이후 1991년 11월 평양에서 북-일 간 수교 교섭 1차 회담이 열려 2000년 8월 10차 회담까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핵 개발과 일본인 납치 사건으로 더 이상 진전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2002년 9월17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일본 총리가 전격적으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하면서, 관계 정상화에 중대한 돌파구가 마련됐습니다.

[조선중앙TV 보도] “김정일 동지께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와 함께 평양선언에 서명하셨습니다.”

평양선언에는 2002년 10월 중 양국 간 국교 정상화 교섭 재개, 국교 정상화 후 일본 측의 대북 경제협력 등 4개 항이 포함됐습니다. 특히 김 위원장은 이 정상회담에서 처음으로 북한 공작원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를 인정했습니다.

고이즈미 총리는 김 위원장이 과거에 북한 관계자가 행한 일을 솔직히 시인하고 유감의 뜻을 밝히면서, 사과와 함께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고 말했습니다.

북한은 납치 피해자 5명에게 일본으로의 일시 귀국을 허용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이들 5명을 북한에 돌려보내지 않으면서 북한에 남은 가족들과 헤어지게 됐고, 북-일 관계는 냉랭해졌습니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2004년 5월 다시 방북해 납북 문제를 해결하는 조건으로 북한에 25만t 식량 원조와 1천만 달러 상당의 인도주의적 원조를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이에 김 위원장은 납북 일본인 문제에 대한 재조사를 약속했지만, 이후 북한은 형식적인 재조사에 그쳤고, 이에 따라 북한에 대한 일본 내부의 비난여론은 높아졌습니다.

납치 피해자 가족 대표인 이자카 시게오 씨는 아직 안부가 확인되지 않은 다른 납치 피해자들에 대한 재조사의 기한조차 정하지 못한 고이즈미 총리에게 매우 실망했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그 해 11월 방북한 일본 정부 실무 대표단이 갖고 나온 요코타 메구미의 유골은 북-일 관계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갔습니다. 12월 일본 정부가 요코타 메구미의 북한인 남편에게서 건네 받은 유골을 감정한 결과 가짜로 판명됐다고 발표하면서 일본 열도는 순식간에 반북 여론으로 들끓게 된 것입니다.

북한의 반발도 거셌습니다. 2005년 1월 관영 `조선중앙통신’ 보도를 통해 일본의 유골 감정 결과를 조목조목 반박하고 일본 정부의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북한과 일본은 그동안 여러 차례 협상을 통해 납치 문제를 논의했지만, 모든 피해자의 귀국과 진상 규명 등이 이뤄지지 않는 한 납치 문제가 해결됐다고 할 수 없다는 일본의 입장과, 납치 문제는 이미 해결된 문제라는 북한 측의 주장이 맞서면서 논의는 한 발짝도 진전되지 못했습니다. 특히 북한 측은 일본 정부가 과거 청산을 회피하기 위해 납치 문제를 이용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2006년7월5일 북한이 대포동 2호 등 미사일 7발을 동해로 잇따라 발사하자, 일본 정부는 즉각 강경 제재에 돌입했습니다. 석 달 뒤인 10월 북한이 핵실험까지 강행하자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아울러 두 차례에 걸쳐 북한 상품 수입과 북한 국적자의 입국, 사치품 수출 금지 등 별도의 제재 조처까지 취했습니다.

2007년 2월13일, 6자회담에서 2.13 합의가 타결되면서, 북-일 국교 정상화 실무그룹 구성이 합의됐습니다. 한달 뒤 북한과 일본은 베트남의 하노이에서 회의를 열었지만 아무런 진전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북한 측 수석대표인 송일호 조-일 국교 정상화 교섭 담당 대사는 일본 측 입장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송일호] “일본 측은 납치 문제가 최우선적으로 해결돼야 국교 정상화를 하겠다고 하면서, 생존자 전원 귀국, 진상규명, 실행범 인도 등을 고집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본 측의 입장을 절대로 접수할 수 없습니다.”

이로 인해 북한과 일본 두 나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됐습니다. 일본은 납치 문제를 이유로 6자회담 합의에 따른 대북 지원에 참가하지 않았고, 북한은 일본을 6자회담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북한과 일본은 2008년 8월 중국 선양에서 열린 6자회담 북-일 국교 정상화 실무회의에서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피해자 재조사를 위한 위원회 구성과 2008년 가을 내 재조사 완료 등에 전격 합의했지만, 이후 공식적인 대화가 끊겨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가운데, 2009년 5월 북한이 2차 핵실험을 실시하자 일본 정부는 유엔 안보리 제재와 별도로 대북 수출 전면 금지 등 대북 압박의 강도를 한층 높였습니다.

이에 북한은 제재 해제를 요구하면서, 일본이 적대정책을 포기하지 않을 경우 북-일 관계에 어떤 변화도 없을 것이라고 밝히는 등 양측의 관계는 과거 어느 때보다 경색돼 있는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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