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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획] 부시 집권 8년: ‘악의 축에서 협상으로’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은 어제부터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집권 8년이 한반도에 끼친 영향을 정리하는 특집 기획을 보내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두번째 순서로 부시 대통령의 대북 핵 정책과 평가를 최원기 기자가 정리했습니다.

미국의 제 43대 대통령인 조지 부시 대통령의 한반도 정책은 크게 2개의 시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악의 축'시기이고 또 다른 것은 '크리스토퍼 힐'시기입니다.

부시 대통령의 집권 1기 한반도 정책을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단어는 '악의 축'입니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 2002년1월 부시 대통령은 의회에서 행한 국정 연설을 통해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지목했습니다."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연설은 전임자인 빌 클린턴 대통령의 대북 정책을 180도 뒤집는 것이었습니다. 전임자인 클린턴 대통령은 '건설적인 개입 정책'을 통해 북한 핵문제도 해결하려 했습니다. 이 때문에 클린턴 대통령은 1994년 10월 북한과

미-북 제네바 합의를 맺은데 이어 2000년 말에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미-북 정상회담을 가지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등장한 부시 대통령은 전임자인 클린턴 대통령이 추진해온 한반도 정책을 모두 뒤집었습니다. 부시는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한데 이어 북한을 '선제공격' 명단에 올리고 김정일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미국의 원로 한반도 전문가인 폴 챔벌린씨는 부시 대통령의 대북 정책은 '클린턴 정책만은 안된다는 뜻의 영어 약자인ABC로 요약된다'고 말했습니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폭군' '국민을 굶기는 독재자'로 간주하던 부시 대통령의 대북 정책은 그 후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의 방북으로 구체화됩니다. 지난 2002년 10월 평양을 방문한 제임스 켈리 동아태 차관보는 북한의 강석주 부상을 만났습니다. 켈리는 이 자리에서 "당신들이 비밀리에 우라늄 농축을 하는 것을 알고 있다"고 북한을 추궁했습니다. 그러나 강석주 부상은 "우리는 그보다 더한 것도 갖게 돼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후 북한은 영변의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감시 요원을 추방했습니다. 2차 북한 핵 위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북한 핵위기가 불거지자 부시 대통령은 2003년 8월부터 6자회담을 가동했습니다. 미-북 회담을 통해 제네바 합의를 이룬 전임 클린턴 대통령과 달리 자신은 미국, 한국, 중국, 일본, 북한, 러시아가 참여한 6자회담으로 북한 핵문제를 해결한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6자회담이 가동됐지만 북한 핵문제는 지지부진할뿐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부시 행정부가 분열돼있었습니다. 부시 행정부의 2인자인 딕 체니 부통령과 국방장관인 도널드 럼스펠드 그리고 국무부 군축안보담당 차관이었던 존 볼튼 같은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은 북한에 대한 압박 정책을 주장 했습니다. 반면 국무부의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북한에 대한 '건설적 개입'정책을 주장했습니다. 그 결과 부시 행정부는 2001년부터 5년간 북한에 대한 압박정책도, 개입정책도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2006년 10월9일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하자 부시 행정부의 대북 정책은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동시에 이 위기는 부시 대통령이 대북 정책을 크게 선회하는 전환점이 됐습니다.

"미국 서부 버클리대학의 로버트 스칼라피노 석좌교수는 초기에 강경하던 부시 대통령이 핵실험을 계기로 대북 개입정책으로 크게 선회했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북한 핵실험은 국무부의 대북 협상파인 크리스토퍼 힐 동아태 차관보가 힘을 얻는 계기가 됐습니다. 힐 차관보는 북한 핵실험 석달 뒤인 지난 2007년 1월 외교 관례를 깨고 베를린에서 북한의 김계관 외무성 부상과 단둘이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이 자리에서 핵 문제 해법을 만들어냈고, 이는 한 달 뒤 베이징에서 타결된 6자회담 2.13합의의 모체가 됐습니다.

힐 차관보가 2.13합의에 이어 핵문제 해결 방안을 담은 10.3 공동 성명을 마련하는 등 성과를 내자 부시 대통령은 힐 차관보에게 힘을 실어줬습니다. 워싱턴 포스트 신문에 따르면 당시 부시 대통령은 힐 차관보를 백악관으로 불러 딕 체니 부통령, 콘돌리자 라이스 장관, 그리고 스티븐 해들리 국가안보 보좌관 등과 함께 아침을 들면서 북한 핵문제를 논의하기도 했습니다.

뒤늦은 정책 선회이긴 하지만 '협상을 통한 핵문제 해결'이라는 부시 대통령의 집권 2기 대북 정책은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 2007년 2월 북한의 영변 핵시설 가동을 중단시킨데 이어 불능화도 90% 이상 달성 했습니다. 또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지난해 6월에는 북한으로부터 핵 신고를 받았습니다. 또 1만9천여 쪽의 핵문서를 건네 받은데 이어 영변 핵시설 냉각탑을 폭파하는 성과도 올렸습니다. 또 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20년 만에 테러 지원국에서 해제하기도 했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앞으로 45일 뒤에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비핵화 2단계를 끝내 마무리하지는 못했습니다. 당초 부시 대통령은 핵검증 의정서를 체결해 비핵화 2단계를 마무리 하고 핵문제를 차기 오바마 행정부에 물려줄 방침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연말 '시료 채취'를 둘러싼 갈등으로 핵검증 의정서는 끝내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미 국무부의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는 북한이 이번에는 핵검증 의정서를 맺을 뜻이 없는 것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최근 북한 핵 문제를 자신의 업적 중의 하나로 꼽았습니다. 백악관은 새해에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통해 '북한으로부터 핵무기 프로그램을 폐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은 부시 대통령이 이룬 성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백악관의 이 같은 평가에 동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집권 전반 5년을 허비해 핵실험을 막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후반에도 핵문제와 관련해 이렇다 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한반도 전문가인 부르스 클링너 연구원은 부시 대통령이 대북 정책을 너무 급격히 선회한데다 핵문제도 제대로 해결하기 못했다고 지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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