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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클래스룸] 인종문제와 미국 학교/대학 탐방 – 듀크 대학


여러 인종들이 모여서 살아가는 미국. 어떤이는 미국을 인종의 용광로, ‘melting pot’ 이라고 표현하는데요, 실제로 용광로 속 금속처럼 쉽게 하나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인종간 융화를 이루는데는 어려움이 많은 것도 현실입니다. 이번 주와 다음 주, 2 주간에 걸쳐 미국 학교의 인종문제에 대해 살펴봅니다.곽현 기자입니다.

미국 교육에서 인종문제와 관련한 역사적 전환점을 꼽으라면1954년의 브라운 대 토페카 교육 이사회 (Brown v. Board of Education of Topeka)소송, 약칭 브라운 소송에 대한 미국대법원의 판결을 들 수 있습니다. 이는1896년 미국 대법원 판결에 근거해 흑인과 백인이 각각 다른 학교에 다녀야만 하던 것이 합법적인 것으로 간주됐던 58년의 역사를 뒤엎는 것이었습니다.

노예해방전쟁이라고도 불리는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나고 전쟁 복구도 끝날 무렵. 연방정부 군대가 남부에서 철수하게 되자 처음부터 노예 해방을 반대했던 남부지역 주들은 흑인과 백인은 같은 공공장소를 사용할 수 없다는 내용의 법안을 통과시키기 시작합니다.

1890년 미국 남부의 루이지애나 주는 흑인과 백인은 같은 열차에 탈 수 없다는 법을 통과시킵니다. 이 법에 반대하는 플레시 대 퍼거슨 (Plessy v. Ferguson) 소송의 원고 플레시 씨는 1/8의 흑인 혈통을 물려받아, 당시 루이지애나 법에 따르면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분류돼있었습니다.

백인 전용열차에 타는 것이 금지돼 있었던 플레시 씨는 백인 전용 열차에 탑승했구요, 유색인종 전용열차로 갈아타라는 요구를 거부하자 체포돼 구속을 당하게 됩니다.

루이지애나 주를 상대로 낸 이 소송에서 재판을 담당했던 퍼거슨 판사는 루이지애나 주의 손을 들어줍니다. 플레시 씨는 퍼거슨 판사의 판결에 대해 항소를 신청하지만, 항소심에서 다시 한 번 패하게 됩니다.

이 판결은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한 미국 사회의 분리법 (segregation laws) 통과에 박차를 가해, 1910년대 우드로우 윌슨 행정부에서는 분리법이 연방의회까지 통과하게됩니다.

교육계 역시 앞서 말씀드린 브라운 소송의 판결이 내려진 1954년 까지 인종 분리정책의 예외가 아니었는데요, 1954년 당시까지 학교의 인종 분리를 의무사항으로 정했던 주가 17개 주, 각 학군의 선택사항으로 남겨뒀던 주가 4개 주 였으며 학교의 인종분리를 금지했던 주는 16개 주로 미국 전체 50개 주의 삼분의 일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브라운 소송은 캔사스 주의 토페카 시에서 13명의 학부형들이 학교의 인종분리 정책에 반대해 토페카 시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제기한 집단소송입니다. 캔사스 주는 당시 1879년 재정된 캔사스 주 법에 따라 인종분리를 선택사항으로 하고있었습니다.

소송을 제기한 브라운 씨의 딸 린다는 일곱 블럭 떨어진 곳에 학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흑인 학교를 가기위해 21블럭이나 걸어가 다시 버스를 타야했습니다.

소송을 제기하기 전1951년, 13명의 학부모들은 미국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 NAACP의 권고에 따라 자녀들을 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학교에 입학시키려고 시도하지만 모두 입학거부를 당합니다.

그리하여 학부모들은 1952년 집단 소송을 하게되고 2년 후 대법원은 이들의 손을 들어줘 플레시 대 퍼거슨 판결이후 58년 간 교육계는 물론이고 미국 사회 곳곳에 자리를 잡고있던 인종분리정책을 종식 시킬 물꼬를 트게됩니다.

브라운 씨 소송의 판결이 내려지고 반세기가 지난 지금, 미국 학교 내의 인종문제는 아직도 완전히 해결되지는 못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아직도 남아있는 미국 학교내의 인종문제에 관해 알아봅니다.

-대학 탐방-

대학탐방 시간입니다. 오늘은 남부에 위치한 비 남부 대학교, 또는 남부의 아이비 리그라는 평을 받고 있는 노스 캐롤라이나의 명문 사학 듀크 대학교를 소개해드립니다.

Marching band

노; 청백 행진곡이 울려퍼지는 듀크 대학교. 조그마한 대학 촌 듀람에 자리잡은 듀크 대학교는 미국 남부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명문 사학의 하나입니다. 그러면서도 동부의 명문들 처럼 까다롭지 않은 대학, 학생들에게 많은 자유와 함께 책임도 부여하는 대학, 그것이 바로 듀크 대학교의 개성입니다.

박; 신생 미국의 서부 진출이 한창이던 1839년, 노스 케롤라이나즈 랜돌프 지역의 몇몇 주민들이 모여, 유니온 인스티튜트라는 조그마한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이 학교는 12년 뒤인 1851년에는 교사 양성을 위한 ‘노말칼리지’로 개편 되었고, 얼마후인 1859년에는 다시 ‘트리니티 칼리지’로 그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트리니티 칼리지는 1924년 듀크 재단의 지원을 받으면서 부터 오늘날의 듀크 대학으로 그 이름이 바뀌고 전국 최고 수준의 종합 대학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노; 듀크 재단의 설립자인 제임스 듀크는 담배 제조 회사인 ‘아메리칸 브랜드’ 사의 창업자로, 당시만 해도 손으로 말아피던 담배를 최초로 자동생산에 성공함으로써 억만장자가 된 기업인이었습니다.

듀크 재단은 오늘날 기금의 규모에 있어서 미국내 10대 재단의 하나로 꼽히고 있으며, 듀크 대학교 외에도 병원, 고아원, 감리교회 등에 막대한 지원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박; 듀크 대학교에는 대학과 대학원에 모두 약 만 2천명의 학생이 등록하고 있어, 종합 대학으로서는 비교적 학생수가 적은 편입니다. 교수 학생의 비율은 9:1로, 이 지역의 다른 어느 대학보다 좋은 교육 여건을 갖고 있습니다.

(추가: 현재 듀크대학에는 학부 문리대와 함께 대학원, 법대, 신학대, 의대, 간호대, 환경 지구과학대, 공대, 경영대등 대학원 과정의 전문직 학교들이 있습니다.)

노; 듀크 대학교에서는 공학분야, 특히 전자공학과 생의학 공학이 전국 최고 수준으로 꼽히며, 생태학, 생물학, 신경과학등도 상위 그룹에 속해있습니다. 가까이 있는 메디컬 센터에 힘입어 생화학과 약리학도 매우 좋은 평가를 받는 학과들로 꼽힙니다. 듀크 대학의 영문학과 낭만주의 연구는 전국의 관심을 끌고 학생들의 인기도 높은 학과들입니다.

박; 정치학과의 한 원로 교수는 이곳 학생들이 학과 성적만 좋을뿐 아니라 지도력도 갖추도록 하는 동시에 자기만의 특성을 가진 인재가 돼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노; 듀크 대학교는 수준 높은 교육의 질과 좋은 환경으로 인해 타 지역 출신 학생들의 비율이 인근 어느대학 보다 높습니다.

대학 과정에는 노스 캐롤라이나 주 출신 학생이 전체의 약 10%, 동남부 지역을 다 합쳐도 25%에 불과합니다. 나머지는 모두 중서부, 동북부, 서부 등지에서 온 학생들입니다. 이처럼 전국에서 모여드는 지원자들 때문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고 역사전공의 한 학생은 들려줍니다.

박; 외국 유학생도 많습니다. 현재 듀크에는 약 10%가량의 외국 유학생이 있습니다.

(추가: 인종별로도 상당한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소수민족으로는 동양계가 20%로 가장 많습니다. 명문대학에 동양계 학생이 많이 진출하는 현상은 이 학교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이에 비해 흑인은 10%, 라틴계는 8%선입니다.)

노; 듀크 대학교는 사립명문으로 수업료가 비싼편입니다. 그래서 부자학생이 많은 곳이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공공정책 전공의 한 학생도 그러한 소문이 사실이라고 들려줍니다.

박; 그러나 사실 학교에서는 지원자의 재정형편은 염두에 두지 않고 학생을 선발합니다. 합격한 학생에게는 어떤 형태로든 필요한 만큼의 지원을 보장해줍니다. 흑인학생과 체육특기생에게도 많은 장학 혜택이 주어집니다. 듀크대학교는 일단 들어온 학생은 이 같은 제도를 통해 이른바 well rounded 즉 모든 분야에 두루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듀크 대학은 스포츠에서도 괄목할만한 실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이 대학의 농구팀 “Blue Devils” 즉 푸른 악마는 여러 차례 전국 챔피언을 차지한 관록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여자 골프와 남자 라크로스도 2002년 전국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고전과 현대가 공존하는 대학, 남부의 따뜻함과 열정이 섞여있는 대학, 그래서 미국 많은 젊은이들이 거리를 따지지 않고 듀크 대학을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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