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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보람] 원응식 씨 – 미국에 표고버섯 들여온 미국 농업계의 개척자


미국인들에게 ‘시타케’란 일본 이름으로 알려져있는 표고버섯은 요즘 미국에서 고급 요리의 재료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 중국 등 아시아에서만 자라는 것으로 알려졌던 이 표고버섯을 미국에 들여와서 대량 생산에 성공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버섯 박사로 불리우는 한인 원응식 씨입니다.

원응식 씨는 현재 워싱톤 디씨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버지니아주 캐틀릿에서 원산농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비닐하우스 처럼 생긴 버섯재배실에 들어가면 어두컴컴한 실내에 여러 층 짜리 선반이 늘어서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각 선반 위에는 참나무 톱밥을 압축해 만든 커다란 메주 모양의 덩어리들이 놓여있고, 덩어리 틈새 마다 연갈색 표고 버섯이 뾰족이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강원도 원주 출신인 원응식 씨는 무역업을 하면서 처음 버섯과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원응식 씨//

“미국에 한국의 버섯을 소개하면서 마른 버섯을 수출을 많이 하다 보니까 미국에 이 버섯이 없어요. 표고버섯하고 느타리가.. 그래서 이상하다 그러고 세밀하게 그걸 집중적으로 분석을 해보니까 미국에 재료나 원자재, 이런 건 무지하게 많은데 생산해내는 기술자가 없고, 알지들을 못하고 있어요. 거기서 제가 힌트를 얻었죠. 미국시장에 진출을 해가지고 미국 식탁에 한번 올려놔 보자, 저로선 큰 도박이었죠.”

1970년대 당시만 해도 표고 버섯은 참나무에 종균을 접종해서 재배하는 방식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원응식 씨//

“우리 나라에 거의 참나무가 고갈되는 상태에 들어갔었다고, 그 때 또 시기적으로.. 미국에 와서 조사해 보니까 참나무가 무지하게 많아요. 그런데 이 참나무가 한국 거하고 좀 틀리죠, 성격이.. 그래서 컨네티컷에서부터 아주 작정을 하고 한 30 센티미터 길이로다, 굵기는 한 2인치 정도 되는 거 그렇게 작은 걸로 해 가지고 토막을 잘라서 자꾸만 수집을 해서 가방에 담았어, 이걸.. 큰 가방으로 두 개가 되더라구요, 이게..”

해외여행이 쉽지않던 시절, 미국에 다녀오면서 참나무 표본만 여행가방 가득히 싣고 들어오니 세관직원들로부터 엉뚱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했습니다. 원응식 씨는 임업시험장에 미국에서 들여온 참나무 표본을 옮겨놓고 표고버섯 재배시험에 들어갔습니다.

//원응식 씨//

“그 다음부터는 접종하고 나서는 매일 일이 거기 가는 거에요. 회사 잠깐 나왔다가는 그거 가서 관찰하고.. 어린 아이를 강변에 내놓은 것 같은 기분이에요. 잠을 못 자겠더라구요. 6개월 동안에 나무의 색깔, 변화, 이걸 전부 다 조사하는 거에요. 왜 일기에 따라서 다르고 습도에 따라서 달라져요, 이게.. 6개월 갔는데 회사에 있는데 거기서 전화가 왔대요. 빨리 오라고.. 그래서 쫓아갔더니 옥동자를 하나 분만을 했어요. 버섯이 나왔어요. 나왔는데 스티커를 보니까 버지니아산 원목에서 나왔더라구요.”

원응식 씨는 시험 결과 버지니아산 참나무에서 자란 표고버섯이 한국산보다 품질이 더 우수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습니다. 여기에 용기를 얻은 원응식 씨는 한번 도전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미국으로 뛰어 들어왔습니다. 버지니아주 샤를로츠빌 인근에 적당한 농장 자리를 찾아냈지만, 땅을 살 돈이 없었습니다. 수중에 현금이라곤 80달러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원응식 씨는 어떻게 해서든 자금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에 뉴욕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아는 사람들을 모두 한식당에 불러 모으라고 말합니다.

//원응식 씨//

“내가 이런 사업을 하러 왔다, 내일부터 변호사 사가지고 주식회사 만든다, 미련없이 이걸 투자해 다오… 그래 얼마냐 이거에요. 쉐어 하나에 엉뚱한 짓을 했어요. 쉐어 하나에 5천불을 받았어요. 그러니까 자기들 주머니들 털어 가지고 두 주 산다, 세 주 산다, 네 주 산다, 딴 사람이 사니까 또 사더라구.. 또 이 사람이 가서 또 어떤 사람을 끌고와요, 또..”

그렇게 끌어모은 돈으로 원응식 씨는 버지니아주 버킹검군에 미국 최초의 버섯 생산 주식회사 엘릭스를 차립니다. 참나무를 잘라서 나르고, 종균을 접종하고, 가슴을 졸이며 들여다 보길 6개월, 마침내 판매가능한 품질의 버섯을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원응식 씨//

“버섯을 만들어 놓았으니 뭐 하냐, 그것만 들여다보고 좋다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이것도 한 2~3일 동안 잠을 못 잤다고.. 이걸 들고가서 얘기해 봤자 미국 사람들은 쳐다도 안 봐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안되겠더라구.. 옛날에 거래했던 중국 사람들.. 이 사람들이 뉴욕에 차이나 타운이 커요. 들고 거길 갔죠. 거기 가서 들이미니까 차이나 타운의 중국 사람들은 알잖아요, 이 버섯을… 이거 어디서 났냐 이거야, 이 생 거를.. 내가 생산한 거라고 그러니까 깜짝 놀라요. 자기들은 몰랐다고.. 우찌 됐던 간에 내가 이거 팔아야 되겠다고 그랬더니 전부 다 사겠다는 거에요. 전부 다… ”

원응식 씨의 표고버섯 농장은 1983년 버지니아주 윌리암스버그에서 열린 선진7 개국 정상회의를 계기로 주목을 받게 됩니다.

//원응식 씨//

“백악관의 주방 있잖아요. 여기서 정상들의 입맛, 식단, 이걸 다 짭니다. 그 때 일본의 수상이 뭘 좋아하느냐, 표고버섯이 일본 말로 시타케라고 하거든… 시타케는 이 사람이 아주 엄청나게 좋아해. 그럼, 시타케는 한국하고 일본 밖에 없는 거야 이렇게 된 거야. 일본에서 공수해 와야돼, 이거... 그랬는데 우리 카운티에서 우리 관내에 있는데… 없다, 있다, 없다, 있다된 거야, 이제.. 이러니까 그럼 우리 확인하자… 헬리콥터가 농장에 두 대가 떴어요.”

원응식 씨는 정상회의 만찬을 위해 표고버섯 2백 킬로그램을 백악관에 공급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취재차 따라왔던 뉴욕타임즈 신문기자가 표고버섯을 소개하는 기사를 신문에 크게 실으면서, 원 씨의 버섯 농장도 미국 전역에 알려지게 됐습니다. 미국의 고급 수퍼마켓 회사인 버두치에 표고버섯을 납품하는 등 농장이 성장하던 무렵, 원응식 씨는 한 차례 시련을 겪게 됩니다.

//원응식 씨//

“종업원이 1백8명이 됐는데 이게 1백8명이 되다 보니까, 그 사람들이 나를 살살 알아보니까 이게 불법체류자이면서, 흔해 빠진 그린 카드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야, 그런 상황에서 자기들을 부려먹고 자기들 저거 하는데 엄청나게 엄하게 다루고 있거든.. 그게 아마 좀 아니꼬웠던 모양이에요, 사실은… 조그만 동양 사람이 그러니까… 자기들끼리 뭘 만들었느냐 하면 유니온을 결성을 했어요. 자기들끼리.. 그러니까 아찔하더라구요.”

원응식 씨는 3개월 사업용 비자로 미국에 들어온 뒤 그냥 주저앉았기 때문에 당시 불법체류자 신분이었습니다. 하지만 배짱 하나 밖에 없었던 원응식 씨는 정면돌파로 승부를 걸기로 작정합니다.

//원응식 씨//

“난 밀릴 것 없다. 돈은 미국 자본이니까.. 미국 자본 끌어들여서 미국 자본 갖고 썼으니까 난 그만 해도 한 세월 잘 보냈다, 난 툭툭 털고 가면 돼요. 손해날 것 없어… 이 사람들이 유니온 서류를 다 만들어 가지고 주 정부 노동부에다 신청을 했어요. 노동부의 디렉터가 둘이 나왔더라구… 두 사람 보는 데서, 그것도 유니온 결성했다는 책임자들 쭉 있는데서, 사무실에서, 서류를 반을 북 찢었지. 그리고 트래시 (trash, 쓰레기통)에다 딱 넣고, 내 사인은 이거야.”

원응식 씨는 직원들을 전부 한데 모으게 한 뒤 노조 가입서류에 서명한 사람들을 전원 해고하는 등 강경한 태도로 밀고 나갔습니다. 1백여명의 직원들 중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은 20여명에 불과했습니다.

//원응식 씨//

“그 사람들은 모르고 안 했어. 알고 안 한 것도 아니야. 넌 왜 안 했냐니까 몰랐대, 자기는.. 나머지 한 80명 가까이 되잖아요. 체크 써 가지고 당장 화이어 시켜라.. 그랬더니 난리가 났어요. 데모하라는 얘기야, 내 얘기는.. 그럼, 여론화될 거 아닙니까? 여론화되면 내가 다 밝혀지잖아요. 속속 다 밝혀지잖아. 그러면 그 때 협상이 되든지 쫓겨 가든지, 유치장에 가든지, 뭔 수가 나잖아, 좌우간..”

이같이 대규모 해고사태가 발생하면서 농장이 문을 닫을 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퍼지자 지방 정부 당국이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버킹검군은 버지니아주에서 가장 가난한 군의 하나였고, 원응식 씨가 운영하던 버섯 농장 엘릭스는 버킹검군에서 최대의 고용주나 다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원응식 씨//

“달래더라구… 변호사들 달라붙고, 목사가 달라붙고 그러고 달래더니 뭐라고 그러냐 하면 가족에 대해서 얘기를 해요. 가족.. 그 때 가족이 서울에 있었어요. 너 한 2년반 되도록 혼자 사는데, 가족은 어떻게 했냐고.. 가족을 데려다 주겠대요, 여기.. 그러면 그게 영주권이 나오는 거에요. 필요 없어, 나 혼자 사는 게 좋아. 그렇게 해 주겠대요. 하려면 하고 맘대로 해, 너희 맘대로 해. 나 사실 속으론 바래는 거지, 이제..”

가족들이 미국에 들어오면서 안정을 찾은 원응식 씨는 1989년 엘릭스 주식회사를 정리하고, 버지니아주 캐틀릿으로 옮겨와 원산 농장을 열었습니다. 원응식 씨는 표고버섯에 이어 느타리버섯 재배에도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몇년전 부터는 검은콩도 재배해 생산하고 있습니다. 표고버섯 재배도 이제는 거의 자동화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참나무를 베어서 일일이 날라야 했지만 요즘에는 압축톱밥을 사용하면서 노동력에 대한 의존도도 줄어들었습니다.

//원응식 씨//

“그 때는 1백8명 있었는데 지금은 단 일곱명 밖에 안돼요. 거의 기계화 시켰어요. 거의 자동으로 다 돌아가요.”

원응식 씨는 그동안 버섯재배 연구를 거듭하면서 지난 2003년에는 농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원응식 씨//

“종자를 연구해서 종자를 또 보급하기 시작하고, 교육을 하라면 교육을 하고… 내 나름대로 필기하고 뭐 그걸 배포하고 수천권을 배포를 했다고… 논문 쓰고 뭐 하고 이러다 보니까 한6년반 걸려가지고 학위를 따게 됐지요. 난데 없는 버섯 박사가 됐어요.”

고집과 배짱으로 미국에서 표고버섯 대량생산에 성공한 원응식 씨, 고려시대 원나라에서 몰래 목화씨를 들여왔던 문익점처럼 원응식 씨는 한인으로서 미국 농업계에 한 획을 그은 개척자로 남게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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