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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리포트] 북한 방문기 -1회- ‘평양, 이념 과잉 도시’


2007년 7월.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 기자가 직접 둘러본 평양은 최고 지도자에 대한 찬양과 각종 구호가 넘쳐나는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길거리에서 만난 주민들의 얼굴에는 생활고에 지쳐 피곤한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은 최근 한국의 한 방북단의 일원으로 북한을 다녀온 저희 방송 최원기 기자가 살펴본 2007년 7월 북한의 모습을 세 차례에 걸쳐 전해드립니다. 최 기자는 6월28일부터 나흘 간 평양과 백두산, 묘향산 등지를 둘러봤습니다.

지난 6월28일 오전 10시. 기자는 서울 김포공항에서 북한 민항기인 고려항공 일반석 20A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한국의 한 민간단체의 주선으로 구성된 1백여명 방북단의 일원으로 평양 등지를 둘러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기내에는 북녁땅을 가본다는 설레임과 흥분이 가득했습니다.

비행기는 불과 1시간만에 평양의 순안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김일성 주석의 사진이 전면에 나붙어 있는 순안공항의 2층 청사는 국제공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했습니다.

1960년대 서울의 김포공항 청사도 그 보다는 나을 것 같았습니다.

기자는 공항에 서있는 비행기를 세봤습니다. 헬리콥터 한 대를 포함해 모두 14대였습니다. 그 중 7대는 제트기고 나머지 6대는 구식 프로펠러기였습니다. 그나마 고장이 나서 천을 씌워놓은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외국 항공기는 단 한 대도 없었습니다. 중국 비행기도 없고 러시아 비행기도 없었습니다. 새삼 북한이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고립된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자가 동행한 1백여명의 방북단은 모두 4대의 관광버스에 나눠 탔습니다. 버스 한 대마다 3~4명씩 탑승한 북측 안내원들은 다소 쑥스러워 하면서 남측으로 부터 온 손님들을 맞았습니다.

이밖에도 안내원들이 주의를 준 것이 있습니다. 버스를 타고 이동 중에 사진을 찍지 말 것, 북한주민을 만나는 등 개인 행동을 하지 말 것 등이었습니다. 또 안내원은 남북한 간의 언어차이에서 오는 문제도 얘기했습니다.

예컨대 북한 사람들은 “일 없습니다” 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이는 ‘괜찮습니다’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남한 사람들은 이 말을 ‘나는 관계없다’ 라는 뜻으로 해석해 기분 나빠 하는 경우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버스 뒤에서 누군가가 익살스런 목소리로 “일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농담 한 마디로 버스 안의 분위기는 단박에 화기애애해졌습니다.

방북단은 이날 오후에 평양 방문의 `필수' 코스를 둘러봤습니다.

사망한 김일성 주석의 고향인 만경대와 그의 거대한 동상이 서 있는 만수대, 그리고 소년 학생궁전 등을 차례로 돌아보고 저녁에는 북한 어린이들의 공연을 관람했습니다.

기자의 눈에 북한은 정신과 물질의 균형이 깨진 나라였습니다. 좀더 정확히 말해 평양은 물질은 형편없고 대신 이념과 구호가 판치는 이념과잉의 도시였습니다.

어디를 가도 ‘혁명과 항일,’ 그리고 1930년대 신파극의 변사를 떠올리게 하는 여성 해설원의 ‘김일성,김정일 찬양’으로 가득 찬 사회였습니다.

북한에 이념이 과잉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물질 사정은 극도로 어려워 보였습니다. 기자가 묵은 대동강변의 양각도 호텔은 사정이 좋은 편이었습니다.

음식도 풍부하고 객실도 깨끗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외국인 관광객용 시설에 국한된 얘기고, 평양은 아직 1990년대 중반의 고난의 행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길가에 서있는 회색의 칙칙한 건물은 10년 이상 보수와 수리를 못한 듯 페인트가 벗겨지고 금이 잔뜩 간 흉측한 상태였습니다. 도로는 금이 가고 울퉁불퉁했습니다.

노동당이 부르는 혁명의 노래, 김일성, 김정일 찬가도 주민들에게 크게 감흥을 주지 못하는 눈치였습니다.

회색 인민복을 입은 남자들이나 흰 저고리에 검정치마 차림의 여성들은 생활고에 지치고 피곤한 표정이었습니다.

가끔 길가의 어린이들만이 평소 보지 못하던 외제 버스를 호기심 어린 눈길로 쳐다 볼 뿐이었습니다.

북한에 도착한 이튿날 아침 방북단은 다시 항공편으로 백두산으로 향했습니다. 한 시간 뒤에 백두산 인근 삼지연 공항에 도착한 일행은 또다시 소형버스에 나눠 타고 백두산 정상으로 향했습니다.

백두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아름답다 못해 신비로웠습니다. 공기는 수정처럼 맑았고, 도로 주변에는 야생초와 들꽃이 가득했습니다. 7월인데도 백두산 능선에는 군데군데 눈이 있었습니다.

기자는 10년 전에 중국 연변을 거쳐 백두산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당시 구름 속에서 천지를 보면서 ‘백두산을 북한 쪽에서 올라보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이제 마침내 그 바람이 이뤄져 북한 쪽 코스로 백두산 정상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백두산 정상에는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름과 안개 속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천지는 신비롭기 짝이 없었습니다.

기자는 백두산의 아름다움에, 그리고 10년 만에 바람이 이뤄졌다는 감격에 백두산 정상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오랫동안 그렇게 서있었습니다.

그러나 감격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어디선가 북한의 여성 해설원이 나타나 ‘장군님 찬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백두산 정상에는 ‘혁명의 성산 백두산, 김정일 1992년 2월 16일’이라고 쓰여진 엄청나게 큰 구호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기자는 백두산을 내려오면서 씁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백두산은 한 민족의 마음의 고향이자 민족의 상징인 산입니다. 그러나 북한당국은 백두산을 체제 선전과 장군님 자랑의 소재로 전락시켰습니다.

북한이 언제쯤 이념과잉에서 탈피해 주민들의 삶을 돌보는 정상적인 국가가 될지 궁금해 졌습니다.

- 최원기 기자의 방북기, 모두 3부작으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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