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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한인 100년의 발자취] 미국서 독립의거 - 전명운, 장인환 의사


한인 이민사를 연구하시는 김지수 씨를 모시고 100년이 넘는 한인들의 미주 이민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한국 백성은 어리석어서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요지의 기고문을 미국 신문에 게재한 한국의 외교 고문으로 봉직하던 미국인 듀램 스티븐스에게 총격을 가해 살해한 전명운 의사와 장인환 의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전명운 의사는 1880년 5월 서울 태생으로 1905년 화와이로 이민 왔다가 1906년 5월에 본토로 이주해 철도공사장과 알라스카 어장 등에서 노동에 종사 하다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공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스티븐스의 망언에 분개해 의거를 자청했습니다.

"전명운 의사는 스티븐스의 망언에 분개해 저격했지만 사실은 총이 불발됐습니다. 그래서 총신으로 스티븐스를 때리는데 그때 옆에 있던 장인환 의사가 총을 쏴서 어깨에 총상을 입고 재판에서는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로 석방 되는데 나중에 이름을 맥 필즈 (Mack Fields) 로 개명해1920년 결혼하여 1남 2녀를 두었는데 부인이 1929년에 사망하자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해 세탁소를 운영하며 어렵게 자녀들을 양육하며 살다가 1947년에 사망했습니다."

전명운 의사는 일본 음식은 먹지 않고 일본인을 증오하면서 살았으며 한인사회 모임에 적극 참여하고 3.1절이 되면 강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전 의사에게는 1994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되고 유해는 국립묘지에 이장됐습니다.

장인환의사는 1875년 3월 30일 평양 출신의 기독교인으로 1905년 2월에 하와이로 이민 왔다가 1906년 8월 미 본토로 이주하여 철도공사장, 알라스카 어장 등에서 노동하다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대동보국회 회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스티븐스를 실제로 저격 살해하고 재판에서 2급 살인죄로 25년 징역형을 받고 복역 중 1919년 모범수로 석방된후 1927년에는 귀국해 고향에서 조만식 선생의 주례로 가정을 이루고 평북 선천에 고아원을 설립하기도 했고 일제의 학정 밑에서는 살수 없어 홀로 다시 미국으로 와서 세탁소를 운영했지만 우울증을 극복 못하고 1930년에 자살로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한국정부는 1975년 장인환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고 그의 유해를 국립묘지로 이장했습니다.

다음 주 이 시간에는 한국 독립운동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대한인국민회'에 관해 자세히 소개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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