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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보람] 이광자 씨 - 보조교사에서 교장선생님으로


워싱톤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메릴랜드주 클락스버그 초등학교… 시계가 오전 9시를 가리키면서 조용하던 캠퍼스가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줄이어 늘어선 노란색 스쿨버스의 문이 일제히 열리면서 학생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학생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아침 인사를 하는 이광자 씨, 바로 클락스버그 초등학교의 교장 선생님입니다.

이광자 교장의 하루는 버스에서 내리는 학생들을 맞이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서두르는 아이들에게 뛰지 말라고 주의를 주고, 부모나 형제의 안부를 묻기도 합니다.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온 4백여명의 학생들이 각기 교실을 찾아 흩어진 뒤 이광자 교장은 카페테리아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 학생들을 둘러봅니다.

가정형편 때문에 아침을 못 먹고 온 아이들, 서둘러 집에서 나오느라 아침을 거른 아이들이 수업이 시작되기 전 잠시 짬을 이용해 빵과 우유로 간단히 아침을 때우고 있습니다.

이광자 씨는 교육자가 될 것으론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특히 미국 초등학교의 교장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36년전 미국 땅을 밟은 이광자 씨는 일자리를 찾던 중 우연히 교육계에 발을 들여놓게 됐습니다.

“3년 후에 온 것 같아요. 대학 졸업후에.. 이미 결혼을 한국에서 했고.. 유학을 이제 오는데… 유학보다는 이민 수속을 해서 오는 것이 여기 와서 지내기가 훨씬 수월하다고 얘길 들었어요. 그래서..”

이민 와서 일자리를 찾았지만 웬만한 사무직은 대부분 경험을 요구했기 때문에 취직이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중 아는 이의 소개로 학교 보조교사로 일하게 됐습니다.

“학교에서 이제 영어는 아주 잘은 못하지만 읽고 하라는 대로 할 수 있는 그 정도 실력은 됐었어요. 그래서 보조교사를 하면서 외국에서 온 아이들 영어를 가르쳤어요.”

아이들이 하루하루 발전하는 모습에 보람을 느낀 이광자 씨는 좀 더 체계적으로 교육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제 메릴랜드 대학교에서 교사 자격증을 따기위해 학교를 다녔죠. 이미 교육계로 들어섰으니까 한번 해 보자.. 교사 자격증을 위한 여러가지 과목을 공부하고.. 그리고 제가 직접 티칭을 했기 때문에, 스튜던트 티칭 (직접 학생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 쪽에서 인정을 해줬어요.”

타코마 파크 초등학교 등 몇몇 초등학교에서 보조교사 생활을 하면서 공부를 마친 뒤 정식 교사자격증을 손에 쥐었습니다.

“처음에는 영어를 가르쳤기 때문에 초등학교에서.. 유치원에서 5학년까지 가르쳤어요. 그러면서 레귤러 클래스 (정규과정) 수업을 4학년도 하고, 5학년도 하고 그랬어요.”

당시 메릴랜드주 몽고메리군에 한인 교사는 이광자 씨를 포함해 두 사람 뿐이었습니다. 그 때는 한인 이민물결이 막 시작되려는 무렵으로 학교에 한인 학생들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영어에 서툰 한인 학생들이 학교에서 어려움을 겪는 일이 많았지만 제대로 통역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광자 씨는 몽고메리군의 귀중한 자산으로 떠오릅니다. 이민자 가정의 학생들이 늘어나면서 이광자 씨도 점점 바빠졌습니다.

“예를 들어서 반 나절만 하는 날인데 부모님들이 드랍시켜놓고(내려놓고) 간다든지.. 그런 일에서 부터 아주 엄청난 패싸움같은 일까지 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부모님들하고 의사소통이 안 되고 이래 가지고.. 저를 불러내다 보니까 제가 수업을 할 수가 없잖아요. 결국 학교 당국에서 너무 이게 힘드니까 저를 학부모 담당으로 자리를 하나 만들었어요.”

교실에서 아이들을 직접 가르치는 일은 아니었지만 이민자 가정의 학생들과 학부모들을 돕는 일에서 이광자 씨는 보람을 느꼈습니다. 미국내 이민자 수가 늘어나면서 몽고메리군 학교내 외국태생 학생들도 점점 많아졌고 따라서 타인종 교사의 수요도 높아졌습니다. 이광자 씨는 17대 1이 넘는 경쟁율을 뚫고 새로 교사채용 전문가로 일하게 됐습니다.

“여러 대학이라든지 컨퍼런스(회의) 이런데 가서.. 우리가 리쿠르트(모집)를 해서 선생님들을 모셔오는데.. 제가 그 때 아시안들을 많이 찾아 왔었어요. 물론 아시안만 하는 거 아니라 전체를 다 하지만은 제가 아시안이니까 특별히 더 신경을 써서...”

아시아인들은 성실하다고 정평이 나 있지만 조용하고 창의적인 면에서는 뒤떨어진다는 고정관념이 미국사회에 있다고 이광자 씨는 말합니다. 그리고 그같은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스스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광자 씨는 원래 내성적이었지만 노력을 통해 성격을 바꿀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예. 제가 처음에는 이름 말하고 내 소개하는 걸 항상 클래스마다 하잖아요. 그런 것도 굉장히 가슴이 떨려서 막 그랬는데.. 부모님 앞에서 얘기 해야되고, 아이들 수백명 앞에서 얘기해야 되고 그런데.. 그렇게 소개하는 것 까지 겁이 날 정도로 소심해선 안 되겠다 싶어서 제가 많이 그런 면에서 노력을 했어요.”

이광자 씨의 이같이 노력하는 자세는 곧 주위의 인정을 받게 됩니다. 이광자 씨는 교사채용 전문가로 일한 지 8년 만에 교육감의 직접 추천을 받아 초등학교 교감으로 나가게 됩니다.

2년 동안의 교감생활과 1년 교장 인턴과정을 거친 이광자 씨는 1997년 드디어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초등학교 교장이 됩니다.

처음 교장으로 부임했을 때는 학교에 한인 학생이 한 명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87 퍼센트가 백인이었습니다. 학부모들 중에는 느닷없이 나타난 동양인 교장에게 알게 모르게 반감을 보이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어색하고 좀 불편한 점도 있었을 거에요. 마음 속에.. 저는 저대로 그 분들을 다 보듬어서 일해야 하는 사람의 입장이니까… 제가 더 신경을 많이 쓰게 되고… 그래서 첫 해는 참 힘들었어요.”

이광자 씨의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학부모들 사이에 알려지면서 그동안 경계심을 보이던 학부모들도 차츰 마음을 열게 됐습니다. 클락스버그 초등학교 학부모인 메리 펜드릭 씨는 이광자 씨가 부모들의 얘기를 늘 귀담아 들어주고 도와주려고 노력한다며 훌륭한 교장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광자 교장은 학교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나는지 잘 파악하고 있다고 펜드릭 씨는 말했습니다. 또 교장실의 문은 항상 열려 있기 때문에 학부모들은 걱정되는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이 교장을 찾아가 상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많은 학부모들이 도서판매 행사 등 여러가지 학교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만 한국의 치맛바람과는 다르다고 이광자 씨는 말합니다.

“PTA 자체 내에서 행사가 굉장히 많아요. 북 페어니, 스프링 페어니, 사이언스 페어니.. 그런 많은 프로그램을 학부모, PTA에서 하는 거지, 개인이 와서 치맛바람이라든지… 한국 식으로 그런 건 전혀 없고.. 여긴 촌지 같은 것도 전혀 없고..”

이광자 씨는 한인 학부모들 중에는 자녀의 담임 선생님 선물 문제로 고민하는 경우가 많은데 미국에서는 교사에게 너무 비싼 선물을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한국 학부모들이 맨 처음 와서 선생님한테 무슨 선물을 해야될 지 이런 것도 저한테 전화문의가 굉장히 많이 왔었어요. 항상 선생님 생일하고 연말에 그럴 때 조그만 성의를 표시하면 된다… 5불, 10불, 그야 말로 비누 하나라도 아이들 편에 보내는 거지.. 한국 식으로 돈을 많이 들여서 하면 여기서는 오히려 더 이상하니까…”

요즘 클락스버그 초등학교는 인종시장을 방불케 합니다. 이광자 씨가 처음 교장으로 부임했을 당시 78 퍼센트에 달했던 백인 학생의 수는 이제 49 퍼센트 수준으로 떨어졌고 나머지 51퍼센트는 20여명의 한인 학생들을 포함해 인도계와 중국계, 중남미계 등 타인종 학생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전체 학생수도 10년전 3백여명에 불과했던데 비해 지난 해에는 7백명까지 늘어났었습니다.

인근에 새 학교가 생기면서 올해 학생 수가 4백명으로 줄긴 했지만 주변에 계속 새 주택단지가 들어서고 있기 때문에 당분간 학생 수는 계속 늘어날 전망입니다.

이광자 교장의 하루는 늘 분주합니다. 아침 여덟시에 출근하면 저녁 6시가 훨씬 넘도록 학교를 떠나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이광자 씨는 학부모나 교사 간에 의견차이가 있을 때 서로 자기 주장만 내세우려 할 때가 가장 고충스럽다고 말했습니다.

“부모님들이 학교에서 처리하는 여러가지 일들에 컨플릭트(갈등)가 있다든지. 그거에 대해서 불만족해 한다든지.. 그런 일들을… 매일 그런 일들을 하죠.”

하지만 이광자 씨는 아이들이 발전해 나가는 모습을 볼 때나 학교 교사들이 외부에서 인정을 받는 것을 보면 자신의 일처럼 기쁘고 보람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제가 선생을 하면서 아이들이 배우는 모습을.. 하루 하루 달라져 가는 걸 봤을 때 그렇게 기뻤을 수가 없어요. 지금은 제가 직접 가르치질 않으니까 그런 아주 기쁨 보다는 크게.. 더 이제 덩치가 커졌으니까.. 자기 만족이라고 할 수 있죠.. 제가 한 일에 성과가 있었을 때 만족을 얻게 되고..”

이제 이광자 씨가 클락스버그 초등학교 교장으로 일한 지도 10년이 됐습니다. 30여년전 우연히 들어선 교육자의 길… 미처 생각지 못했던 길이지만 기쁨과 보람이 가득한 길이었다며 은퇴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이광자 교장은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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