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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정부차원 사과, 국가 책임론 부각 우려


미국 역사상 최악의 총기 사건으로 기록된 버지니아 공과대학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이 한국인 학생으로 밝혀지면서 한국 정부는 공식 사과에 가까운 애도를 표명했습니다. 또 미국 내 일부 한인사회는 희생자들과 유가족을 추모하는 기도회와 촛불집회 등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한국 일부에서는 이같은 대응이 '한국 책임론'을 부각시키는 부정적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와 비판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연철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이 한국인 학생으로 밝혀진 후 깊은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저와 우리 국민은 크나큰 충격과 함께 비통한 심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희생당한 분들의 명복을 빌며 부상자와 유가족 그리고 미국 국민들에게 마음으로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한국 정부도 즉각 외교통상부를 중심으로 긴급대책반을 구성해 상황을 점검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고, 이 과정에서 미국에 조문사절단을 제의했지만 미국측에서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많은 한국인들도 한국 사람이 그같은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깜짝 놀랐어요.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그래.. 우리나라가 저렇게 할 수도 있나, 부끄럽지 전 세계가 다 보고 있는데..."

서울에서는 추모 촛불집회가 열렸고, 인터넷 이용자들 사이에서도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물결이 번졌습니다.

이같은 기류는 미국 한인사회로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 범인이 한인이라고 밝혀져서 아주 충격이 더 컸죠. 한인이 여기와서 이민자로 살아가는데 백인이나 다른 민족에게 엄청난 죄를 저지르는 계기가 됐잖아요.."

미국 내에서 한인이 가장 많이 사는 서부의 로스엔젤레스를 비롯해 워싱턴과 뉴욕 등 한인사회는 추모기도회와 촛불집회 등을 열었습니다. 이태식 주미 한국대사는 범인이 한국인 학생으로 밝혀진 지난 17일 워싱턴 인근 페어팩스 군 청사에서 열린 추모예배에 참석해 충격적인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한인사회가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참회하며 미국 주류사회와 다시 융합하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면서, 32일 동안의 금식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한국 일부에서는 한국 정부와 한인사회의 이같은 반응이 오히려 미국사회에 한국의 책임을 부각시키는 부정적 결과를 낳을 우려가 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의 일부 국회의원들은 이 대사의 발언에 대해 인종 갈등과 차별을 전제로 한 사대적 발언이라는 비판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미국 내 한인사회에서도 이번 사건에 대해 충분한 애도와 유감의 뜻을 주류사회에 전달해야 하지만 이 대사가 사죄를 위한 금식까지 제안한 것은 부절적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 그런 차원에서 개인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대사님으로서는 부적절한 발언이 아니었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중론인 것 같습니다."

한미 연합회의 찰스 김 회장은 유감과 사과 표명은 엄연히 다르다면서, 이 대사의 발언은 한국 책임론을 부각시키는 위험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 과잉반응으로 인해서 코리안 이슈가 아닌데 코리안 이슈로 만드는 일이 없도록 거기에 대해서는 의논을 하고 거기에 대한 포지션을 정해야 할 것 같구요..."

이번 사건의 범인이 한국인으로 밝혀진 후 미국 일부 지역에서는 일부 학생들이 한인 학생들에게 욕설을 하는 일이 벌어지고, 또 일부 상점의 유리창이 파손되는가 하면,

한인 밀집지역에 주차된 차량의 타이어를 훼손했다는 등의 언론 보도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김 회장은 이번 일이 한국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한 개인이 벌인 일이라고 강조하면서, 그러나 이번 사건으로 인한 증오범죄가 발생할 가능성을 중점적으로 감시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9살 때 미국으로 이민 와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버지니아주에서 의사로 활동하고 있는 피터 김 씨도 지나친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다는 견해를 보였습니다.

" 한국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금식 같은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은 합리적인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을 해요. 참 놀라운 사건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모든 한국사람들이 같이 사죄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김 씨는 과거 콜로라도주 콜롬바인 고등학교 총기난사 사건 당시 범인들의 조상을 찾아 유럽 나라들에서 사과를 한 적은 없었다면서, 특히 금식 제안 같은 경우는 지나친 제안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김 씨는 이번 사건에 대해 충분한 조의와 유감을 표명해야 겠지만, 전체 한인사회가 요란한 추모나 모금 행사를 벌이는 것보다는 앞으로 주류사회와의 대화를 늘려 한인이나 한국의 모습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많은 미국인들은 한국 정부나 한인사회의 반응에 대해 다소 지나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독일계 미국인인 리차드 사이퍼트 씨는 한국인이나 한국 정부가 책임을 느끼는 것 같은 움직임을 보이는 것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이퍼트 씨는 자신이 잘못을 저질러도 독일 정부가 사과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면서, 이번 사건과 한국 정부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폴라 힉키 씨도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이번 사건을 한 개인이 저지른 일이라고 생각할 뿐, 해당국의 문화와는 연관짓지 않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같은 미국의 주요 언론들은 이번 참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도 범인이 한국인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보다는 경찰의 초동수사 실패와 총기 규제의 허점, 교내 안전대책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미국의 인터넷 이용자들도 이번 사건을 놓고 열띤 토론을 이어가고 있지만, 범인이 한국인이라는 사실과 관련해 한국 또는 한국인을 공격하거나 비하하는 일은 거의 눈에 띄지 않고 있습니다. 그보다는 범인이 한국태생이지만 어릴 때 미국으로 이민와 미국에서 자란 사실상의 미국인이란 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은 실정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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