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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인물] 한국전 참전 노병 워렌 위드핸 - 과거로의 여행 안내로 헌신 


한반도에서 총성이 멎은지 53년이 흐른 지난 7월 27일, 이곳 워싱턴에 있는 한국전 참전 기념비앞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병들은 오늘날의 한국은 자신들이 젊음을 받쳐 싸웠던 육이오전쟁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입증한다고 이구동성 입을 모았습니다. 이시간에는 이들가운데 70대에 접어든 고령의 몸으로 육이오전쟁을 비롯해 미국의 해외전쟁에 파병되었던 재향군인들과 가족들을 이전의 전장으로 재 인도하는 관광사업에 전념하고 있는 워렌 위드핸씨를 소개해드립니다. 취재 보도에 VOA 에서 여름 동안 활동한 진유경 인턴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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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세의 워렌 위드핸 씨는 아직도 자신이 참여한 전투지와 한국의 지명들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한반도지도를 들여다 보며, 워렌씨는 부산과 인천, 서울, 거제도, 그리고 청진에 주둔했었다며 그 지점들을 하나하나 조심스레 지적했습니다. 워렌씨는 육이오발발 거의 3개월만인 9월 15일, 맥아더장군의 지휘로 이루어진, 인천 상륙작전과 또 일사후퇴직전, 1950년 12월, 일명 기적의 구출작전으로도 불리우는, 함경남도, 흥남부두에서의 북한주민 철수작업에도 직접 참가했었습니다.

“When you are eighteen or nighteen years old, right after the highschool….”

육이오전쟁에 참전했을때 워렌씨의 나이는 겨우 18세였습니다. 신병으로 군에 입대했을때 워렌씨는 동방의 작은 나라, 코리아란 이름은 한번도 들어본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속한 부대가 한국으로 파견된다는 말을 듣고 부터 코리아라는 한마디는 그에게새로운 의미로 다가섰습니다. 한국땅에 도착해 소속 부대가 처음으로 투입된 곳은 인천이었습니다.

이미 남한을 침공한 북한군의 배후 공급선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의 인천 상륙작전에 소속부대원들이 주역을 맡았던 것입니다. 또 그다음달인 10월, 중공군이 육이오전쟁에 개입하면서, 남한으로 밀려 내려오는 피난민들과 한국 군인들을 탈출시켰던 흥남 대탈출작전 때에도 워렌씨는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워렌 씨는지금 미국의 한국 전쟁 참전용사회 워싱턴 지부장으로 있으면서 육이오전쟁뿐 아니라 미국의 해외전쟁 참전 재향군인들을 대상으로 관광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육이오전쟁을 비롯한 미군 해외전쟁 참전 용사들을 대상으로 이들이 실전에 참여했던 지점들을 되돌아 볼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워렌씨에게 한국, 코리아는 18세이후 삶의 가장 소중한 일부로 자리잡은 것입니다. 워렌씨는 지금까지 40번도 넘게 한국을 다녀왔다고 자랑스레 말합니다. 지난 11월에는 미국연방국회 하원의원과 함께 북한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북한소감을 묻는 질문에 워렌씨는 가장 아쉬었던 점부터 털어놓습니다. 곧, 일반 북한인들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북한정부 당국자가 동행했고, 보통 북한인들과의 접촉을 허용하지 않아 북한인들과 자유롭게 만나 대화할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워렌씨는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남한에 비해 경제적 정치적으로 크게 낙후했고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목격했다고 워렌씨는 말했습니다. 워렌씨는 현재 운영하는 관광회사의 한국 재방문계획에 대한 미군 재향군인들과 그 가족들의 관심이 대단하다고 말합니다.

“We have lot of sons and daughters who go back whose farther has killed in war……”

미국 원호청과 한국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아 운영되는 이 재방문 계획에는 전쟁에 직접 참전했던 사람들 뿐 아니라 부인과 자녀들도 참가할 수 있습니다. 어째서, 피비린내나는 처참했던 전쟁의 상흔이 어려있는 한국땅을 다시 밟으려 하느냐는 질문에 워렌씨는 일순간 상념에 잠긴뒤 말문을 열었습니다.

“There is a curiosity that comes up and it says that ‘I saw Korea when was nothing, now I would like to go back and see what is like today…..”

그 땅은, 세상물정에 눈을 뜨기엔 아직 어렸던 열여덟, 열아홉 나이에 혼신을 다해 적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곳이었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생명을 잃지 않고 귀국해, 가정을 꾸리고 생업에 종사하다 노후을 맞은 노병들로서는, 한국의 눈부신 경제기적에 관한 소식을 접하면서, 새삼 전운을 딧고 국가재건에 성공한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픈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은 어쩌면 인지상정이 아니겠느냐고 워렌씨는 반문합니다.

“Well that is during not program feature for the particular program” “It was during the time at the Heungnam Ceremony”

워렌 위드핸 씨와 한국 전쟁 당시 흥남 대탈출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는 사람은 위드핸 씨의 아들 제이미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여행사에서 아버지와 함께 일합니다. 사람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가는 것이 바로 아들 제이미 위드핸씨의 몫입니다. 그는 참전 군인의 2세로서 한국 재방문 프로그램이 갖는 의미가 크다고 말합니다.

“Because nobody really has ideas about Korean people and government…

전쟁에 참전한 아버지를 둔 사람들도 막상 한국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그는 이야기 합니다. 그들이 한국을 방문해서 자신의 아버지가 지키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으며, 현재 한국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직접 눈으로 본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6월 25일 육이오 전쟁발발 56주년 일을 기념해 한국을 방문했던 위드핸씨는 지금의 서울은 미국의 뉴욕과 같은 전혀손색없는 국제적 대도시라고 말합니다.

“Seoul is like a New York City now. Seoul is very modern city, much improvement, with modern communications. Incheon, when we first landed in Inchen, which is Incheon port.…”

소속 부대가 인천에 상륙했을때 건물은 커녕, 아무것도 없이 황량하기만 했던 그 들판에 그토록 화려한 국제공항이 들어섰다는 것은 실로 상상을 초월한 기적에 가까운 변화라고 워렌씨는 감개무량해 했습니다. 또한 워렌씨는 한국에서 반미시위가 끊이지 않고 있는 현실을 두고 자신은 그것이 대다수 한국인들의 생각이라 여기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The protesters are very small. But protesters are very vocal…”

워렌씨는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개인적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자유야말로, 50여년전 자신을 비롯해 당시 육이오전쟁에 참전했던 미군들이 지켜내고자 했던 소중한 가치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아직도 당국의 탄압과 억압속에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자유를 하루빨리 향유하는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고 워렌씨는 말합니다. 그것이 곧 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청춘을 아낌없이 전투장에 내던질수 있었던 이유였다고, 워렌씨는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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