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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정정기씨 수기 III [탈북자 통신: 김민수]


북한에서 식량난때문에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10대 나이에 식량을 찾아 꽃제비가 되었던 탈북자 정정기씨의 북한탈출과 가족과의 재회 그리고 남한에서의 정착과정을 재 조명하는 3회에 걸친 서울 통신원의 보도, 오늘 마지막회 김민수통신원이 전해드립니다.

2002년 겨울 평양 꽃제비 수용소에 있던 정정기씨(21세, 2003년 입국)에게 어머니의 소식이 들려옵니다. 함경북도 회령에 살고 있던 이모가 어머니의 부탁으로 정기 씨를 찾아온 것입니다.

[정정기] “그때는 진짜 엄마 소리를 딱 들었는데 별로 반갑지도 않고요 처음에는 그리웠지만 한 7년 지나니까 엄마랑 단어가 머리 속에서 점점 없어지고 얼굴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거든요.”

정기 씨의 모친 이정숙 씨(가명)가 아들을 찾는데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린 데는 남다른 사연이 있습니다. 97년 장사 때문에 무산으로 떠난 큰딸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직접 찾아 나선 이씨는 딸이 인신매매 조직에 걸려 중국으로 넘겨진 것을 알게 됩니다. 딸을 찾기 위해 탈북을 결심, 중국까지 나왔지만 넓은 중국 땅에서 더구나 합법적인 신분을 보장받지 못하는 탈북자가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정숙 씨는 식당과 농촌에서 일을 하면서 딸의 행방을 계속 수소문 했습니다. 그러던 중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강제북송을 당하고 맙니다. 재탈북에 성공해 중국에 다시 나왔지만 또다시 체포되어 강제북송됐습니다. 이번에는 노동단련대에 수감되었다가 탈출, 중국에 다시 나온 이후로는 처벌이 두려워 북한으로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한편으론 돈을 벌어 생계를 꾸려가면서 사라진 큰딸과 북한에 두고 온 막내 아들의 행방을 찾으려는 이정숙 씨의 노력은 계속 됐습니다. 이씨의 목표는 오직 하나, 흩어진 가족을 모아 한국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노력한지 6년만에 아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중국 지역 잡지에 낸 광고를 통해 큰딸의 행방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북한에 있는 막내 아들만 중국으로 데려오면 되는데 이모를 따라 회령까지 온 정기 씨가 한국으로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서운함과 탈북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한국 사회를 부정적으로 선전하는 북한의 사상교양이 여전히 정기 씨의 사고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정정기] “제가 그때 안 가겠다고 했어요. 그냥 뭐 엄마도 밉고 좀 그러니까. 그리고 다른 나라들에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안 가겠다고 그랬었거든요.”

둘째 누나가 울면서 달랬지만 정기씨의 마음은 움직이질 않았습니다.

[정정기] “작은 누나하고 한번 통화했는데 작은 누나가 막 울면서 한국 같이 가자고. 큰 누나도 헤어졌지만 큰 누나도 찾았으니까 이제 나 까지만 모이게 되면 온 가족이 다 모이는 거니까 그때 같이 한국 가자고. 나만 들어오게 되면 곧바로 한국 떠나겠다고 그러드라구요.”

안되겠다 싶어 이정숙 씨는 “중국에 나와 엄마랑 누나들 얼굴만 보고 다시 들어가라”고 우회적인 방법을 씁니다. 일단 가족들을 만나면 아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 말만은 뿌리치지 못한 정기 씨는 2003년 이모와 함께 탈북해 7년 만에 어머니를 상봉하게 됐습니다. 아들을 붙잡고 눈물을 쏟는 이정숙 씨와는 달리 정기 씨는 무심하게 서 있었다고 합니다.

[정정기] “젊었을 때 모습하고 딱 7년 만에 엄마 모습이 완전 늙은 거예요. 머리카락도 다 빠지고 그러니까 엄마라는 분위기 보다도 무슨 할머니 만난 듯한 느낌이 들고, 작은 누나도 중국에서 자본주의 물 같은 걸 많이 먹었으니까 말투도 그래 헤어스타일이나 옷 입는 것도 그래 완전 자본주의 식으로 나갔으니까 저건 분명히 우리 가족이 아니라 이런 생각이 들었었거든요.”

한번 중국에 나온 이상 누나들과 어머니는 정기 씨를 돌려보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정기 씨는 가족들의 설득으로 중국에 나온지 1주일만에 한국을 향해 출발했고 동남아시아를 거쳐 2003년 6월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하지만 중국생활이라는 완충장치 없이 바로 한국으로 넘어온 18살의 북한 청소년에게 한국 생활은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들었습니다.

[정정기] “저 같은 경우에는 금방 (북한에서) 넘어오자 마자 한국 넘어왔으니까 음식도 입에 안 맞고 또 이것 저것도 정착도 잘 못하고 그러니까 북한에 자꾸 가겠다고..”

정기 씨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공부였다고 합니다.

[정정기] “일단 공부하는 게 제일 힘들었어요. 제가 와서 한 두달인가 놀고서 학원이랑 다니면서 공부를 시작했거든요. 그때는 진짜 북한에서 배우던 거랑 여기서 배운 거랑 모든 과목이 다 다르잖아요. 다시 새로운 시작을 한다는 게 진짜 너무 힘들어가지고 어떤 때는 학원에 가기 싫어서 안가겠다고 떼쓰고 아프다고 뻥치고...”

급격한 사회 변화를 체험해야 했던 정기 씨는 밖에 나가는 것도 심지어 한국 사회를 엿볼 수 있는 드라마를 보는 것도 피했습니다. 힘든 시간이 1년 정도 지속됐지만 어머니의 보살핌과 또 한국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정기 씨의 생각도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정기] “그냥 한국 사회에 빨리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정착하고 나니까 또 이 사회도 괜찮고 많이 (북한에) 가고 싶다는 마음은 예전보다 많이 없어졌지만 그래도 제가 태어나서 거기서 많은 생활을 했으니까 예전 생활도 좀 그렇게 그러니까 한번쯤 가보고 싶다고 그런 마음이 생기거든요.”

북한과는 달리 일하면 일한만큼 대가가 주어지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한국 사회의 매력도 느끼게 됐습니다. 현재 정기 씨는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대학 입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굶주림, 가족과의 생이별, 5년간의 방랑생활, 꽃제비 수용소 내에서의 일상적인 폭력과 죽음, 그리고 탈북을 경험한 21살의 청년은 평범한 삶을 소망했습니다.

[정정기] “여는 일반사람들처럼 회사원이 되어서 기술 같은 걸 하나 배워서 그걸 죽을 때까지 써먹을 수 있는 기술을 배우고 싶고, 평범하게 그렇게 살고 싶어요.”

지금까지 서울에서 보내드린 탈북자 통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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