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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탈북한 북한 작곡가 김영석씨 한국 생활체험기 [탈북자 통신: 김철]


북한에서 작곡가로 활동하다, 지난 2002년 한국에 입국해 정착한, 새터민, 김영석씨를 서울에 있는 [김철]탈북자 통신원이 만나 한국에서의 생활체험을 들어보았습니다.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 중 북한에서 음악대학을 졸업하고 악기를 수준급으로 다루는 사람은 몇 몇 있지만 작곡과 편곡 능력이 있는 사람은 찾기가 어렵습니다. 김영석(가명, 2002년 입국)씨가 바로 찾기 힘든 사람 중의 한명입니다. 북한에서 작곡가로 활동했던 김씨를 만나 탈북 동기와 한국에서의 생활을 살펴봤습니다.

작곡에 관심이 있었고 소질도 있었던 김영석 씨가 탈북을 하게 된 동기는 출신성분으로 인한 차별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큰 아버지가 전쟁 전에 월남하게 되면서 월남자 가족이 된 김씨는 재능이 있고 충실하게 생활했어도 능력발휘를 할 수 없었던 북한의 현실에 회의가 들었다고 합니다.

자유롭게 작품을 쓸 수 없는 경직된 현실도 탈북을 부추겼습니다. 북한에서는 작곡가 마음대로 가사를 쓸 수 없고 작가들이 쓴 시에 맞춰작곡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작곡된 곡은 중앙의 작곡가협회에서 심의까지 하는데 철저히 당의 방침에 입각한 작곡, 허용된 장르의 음악만을 할 수 있었다고 김영석 씨는 말했습니다.

[인터뷰1] “철저히 당의 방침에 입각한 거기에 맞게끔 작곡을 해야 되고, 제한성이 많지요. 그런 점도 있었고, 그리고 장르별로 보면 남쪽은 재즈라든가 디스코라든가 여러 장르를 할 있는데 북쪽은 클래식 그쪽으로밖에 갈 수가 없는 거지요.”

북한에서 작곡가가 되기 위해서는 매우 어려운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대학 외에는 사실상 작곡을 배울 공간이 없기 때문에 순전히 독학으로 꿈을 키워가야 합니다. 작곡과 편곡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 악기를 다룰 수 있어야 하는데 도(都) 사범대학 음학과에도 조율이 안 된 피아노 몇 대만이 있을 정도로 환경이 열악했습니다. 김영석 씨는 북한에서 A급에 속한다는 인민군 협주단에 있는 작곡가 중에도 피아노를 배울 조건이 되지 않아 휘파람으로 작곡을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라고 실상을 전했습니다.

독학을 하던 김영석 씨도 작곡 공부가 매우 힘들었다고 토로했습니다.

[인터뷰2] “하여튼 작곡 공부하고 꿈을 이뤄간다는 것은 하늘의 꿈이지요. 하늘의 별 같기도 하고. 하여튼 답답했어요.”

김씨가 대학 작곡학부에 입학하기 전까지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었고 또 능력을 펼칠 수 있었던 곳은 10년간 복무했던 군대에서였습니다. 2년마다 한번씩 벌어지는 ‘군무자 축전(인민군과 군대 노무자, 가족들이 벌이는 예술축전)’ 그리고 김일성.김정일 생일 때 열리는 축전 준비를 하면서 음악적 소질을 인정받아 선전대 활동을 하게 됐고 작곡에 필요한 공부도 본격적으로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김영석 씨는 일반병사에서 군단선전대까지 올라가는 등 음악적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군 제대후 대학에서 음악 공부를 계속 했지만 배운 지식과 재능을 펼치기에는 북한 사회는 불합리한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한국을 선택했지만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점이 많았습니다.

[인터뷰3] “한국에서는 이제 제가 처음에 정착할 때는 이쪽에 오면 모든 꿈이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오긴 왔는데 처음에 보니까 힘들어요. 왜냐면 여기 (음악의) 길이 너무나도 많고 작곡시장이라는게 음악시장이라는 게 너무나도 폭이 넓어요. 거기 북한에서 배운 기술 가지고 그걸 뚫고 나간다는 게 쉽지가 않아요.”

김영석 씨는 “한국에서는 북한 음악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문화도 이해하기 힘들었으며 그리고 한국 음악은 왠지 거부감이 생기고 이해할 수 없어 음악을 접고 2년 동안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냈지만 결국은 좋아하는 일, 잘 하는 일을 선택하게 되는데 한국 음악과는 차별성이 있는 북한 음악을 하면 한국 사람한테도 먹힐 수 있다는 자신감도 들었습니다.

[인터뷰4] “북한 음악은 나름대로 특색이 있어요. 독특하게 발랄하고 리듬이 아주 경쾌하고 이런 게 있다 보니까 얼마든지 남한사람한테 전파를 해도 이게 먹히겠다. 그래서 다시 음악의 길을 가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 시작한 것이 아코디언 인터넷 강좌였습니다.

[인터뷰5] “(홈페이지에) 60강의 올려 놨고 이번에도 15강의 올려 놨고 해가지고 그렇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아코디언 주자가 된 거지요.”

현재 아코디언 강좌에는 약 30여명이 수강을 하고 있고 개인교습을 받는 사람도 15명가량 됩니다. 또한 김영석 씨는 북한에서 예술단체장을 했던 경험을 살려 6개월 전 평화통일예술단도 만들었습니다. “남북한의 문화적 장점을 최대한 살리며 북한음악도 남한 사람들이 이해하고 좋아할 수 있도록 하여 남과 북의 문화적 통일을 이루는데 조금이나마 이바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아직 어려움이 많다는 김영석 씨.

[인터뷰6] “어려운 점은 북한 같은 경우에는 단체라고 할 때는 국가에서 다 만들어 주고 거기에 맞게끔 단장도 하라 이렇게 될 수 있는데 여기는 자체로 단장을 하고 애들도 다 모집을 해야 되고 투자, 홍보도 해야 되고 참 대한민국은 어찌 보면 대가를 치러야 되는 나라...”

앞으로 김영석 씨는 한국 노래를 북한식으로 편곡하거나 시중에 나와 있는 아코디언 악보 갱신 그리고 예술단에서 성악, 기악, 화술, 무용조를 다 꾸려 북한식 예술을 살리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습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보내드린 탈북자 통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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