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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 최은희 비공개 면담 모임 주선한 니시오까 일본인 납북자 구출회 부회장 [인터뷰: 탈북자 통신 정세진]


1978년 7월 마카오에서 납북된 중국 여성 <홍렝잉(당시 20세)>씨의 가족(아버지, 오빠)과 홍씨의 존재를 확인해 주었던 영화배우 최은희(81세) 씨가 18일 오후 2시 서울 역삼동의 한 호텔에서 비공개로 면담을 가졌습니다. 이날 모임을 주선한 <일본인 납북자 구출회>의 니시오카 쓰토무 부회장을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올해 85세라는 홍렝잉 씨의 아버지는 ‘북한에서 딸의 좋은 친구가 되어 준 최은희 씨를 꼭 만나고 싶었다’며 반가움을 표시했다고 합니다.

[인터뷰1] “최은희 선생님 만나고 싶었었다. 우리 딸 좋은 친구가 돼줬으니까 북한에서. 그리고 또 최은희 선생 증언 때문에 우리 딸 소식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꼭 만나고 싶어서 80 넘는 나이지만 여기까지 왔다. 그렇게 말씀 하셨어요.”

니시오까 부회장은 홍렝잉 씨가 최은희-신상옥 씨의 수기에서 나오는 <홍여인>과 거의 일치한다는 판단 하에, 마카오 경찰에서 입수한 홍씨의 사진을 들고 지난해 12월 13일 서울에서 최은희 씨를 만난 바 있습니다. 최 씨는 이 자리에서 “틀림없이 미스 홍”이라고 확인해 주었다고 합니다. 18일 면담에서도 가족들의 기억과 최은희 씨의 증언은 일치했습니다.

[인터뷰2] “홍 양이 납치 되었을 때는 (아버지가) 대륙에 있어서 같이 살지 못했었어요. 그래서 어머님이 바느질을 해서 두 남매를 학교에 보냈다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스 홍이 동생을 대학에 보내야 되겠다고 해서, 자기도(홍렝잉) 대학에 가고 싶긴 했지만 사회에 나가서 보석점에서 일을 했대요. 그런 이야기를 최은희 씨가 거기서 들었거든요. 그 이야기를 오늘 확인하니까 맞다. 완전히 일치된다.” 최은희 씨는 가족들에게 북한에서 홍렝잉 씨를 만나게 된 과정도 설명했다고 합니다.

[인터뷰3] “(최은희 씨가) 위가 나뻐가지고 소화가 안 된다고 해서 산보를 했대요. 산보를 해가지고 둘이 만나서 여러 이야기를 많이 나눴대요. 큰 바위 밑에 가서 안 보이게 소주를 가져가서 오징어에다가 해서 술잔 나누면서 고향이야기 그런 이야기 다 했대요.” 최은희 씨의 수기에는 처음 홍씨를 만난 정황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1979년 초여름, 6월경 언제나처럼 산보를 나와 걷고 있는 최은희 씨의 눈에 단발머리가 인상적인 여인이 눈에 띄었습니다. 전형적인 중국인으로 보였던 그녀를 보고 최은희 씨는 직감적으로 자신처럼 납북되어 온 여성인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최씨는 그녀에게서 “중국인인데 마카오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이후 “산보 나가는 길과 시간을 맞추어서 자주 만나 서로를 위로”했습니다.

이렇게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누던 두 사람에게도 이별의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수기에 따르면 1979년 9월20일 최은희 씨가 백두산 초대소로 옮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최씨는 “육친과 같은 정을 느낀 우리 둘이서 헤어지기 전날, 손을 맞잡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고 당시 상황을 적고 있습니다.

니시오까 부회장은 최은희씨가 면담자리에서도 홍렝잉 씨와 헤어졌을 때의 상황을 떠올렸다고 전했습니다.

[인터뷰4] “(홍렝잉 씨와) 한번 이웃에 있었다가 한번 떨어지게 됐을 때 아주 슬펐고 다시 또 같은 동네에서 살게 됐으니까 아주 감격스러웠다. 완전히 이별할 때는 엉엉 큰 소리로 울었다.” 가족들은 최은희 씨를 만나는 동안 감정이 북받쳐 오는지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20살 된 딸의 얼굴만을 기억하고 있는 80대의 아버지는 최은희 씨에게 “다음에는 우리 딸이랑 같이 만나자”며 작별 인사를 전했다고 합니다. [인터뷰5] “다음은 우리 딸이랑 같이 만납시다. 그때까지 내가 80이 넘었지만 그래도 건강하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런 말씀 계셨었어요.” 한편 북한이 납치한 외국인들은 대표적인 나라인 한국과 일본 외에도 레바논, 태국, 중국 등 11개국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니시오까 부회장은 북한의 외국인 납치는 1970년대 말에 집중되어 있었다면서, 76년 해외공작 담당부서인 3호 청사를 접수한 김정일이 “공작원의 현지화를 철저히 하라”는 지령을 내리고부터라고 분석했습니다.

[인터뷰6] “거기에 힌트가 있습니다. 76년에 김정일이가 공작원의 현지화를 철저히 하라. 그런 명령을 내렸어요. 그러기 위해서 현지인 교사를 데려오라. 그런 김정일의 지령에 따라서 70년대 말에 세계 각지에서 납치가 행해졌다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보내드린 탈북자 통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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