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 가능 링크

[영상뉴스] 한국이 낳은 세계적 비디오 예술 거장 백남준, 그의 예술세계와 삶


INTRODUCTION:
Although many people outside the art world don't know who Nam June Paik is, they probably would recognize the quick cutting editing style that he pioneered and is so prevalent in many TV commercial and music videos today. Nam June Paik died on Sunday at the age of 73. Six years ago, VOA's Craig Fitzpatrick met this revolutionary artist. Melinda Smith narrates this look back at Paik's work and his influence on America's media culture.

NARRATOR
Nam June Paik was known as the father of video art. He created an art form using TV monitors, cameras, and video switchers to produce dazzling and entertaining effects.
He was part of the 60's avant-garde art movement, which expanded the definition of art.

NAM JUNE PAIK
"We wanted to criticize everything existing. To put into question everything that existed in 1964."

NARRATOR

This movement even produced "anti-art." Nam June Paik was born in South Korea but received his formal education in Japan, completing degrees in aesthetics and music. He spent the early 60's in Germany, experimenting with musical compositions and video installations, eventually moving to New York in 1964.
In 2000, the Guggenheim Museum in New York showed a retrospective of his art.
One memorable sculpture was his, "Family of Robot." Here Paik bolted old television sets and radio cabinets together to represent the human form. His family consisted of a grandmother . . . and a grandfather . . . and a "High-Tech Baby" who was perpetually hyperactive. In another installation, he placed twenty aquariums in front of twenty TV monitors. He called this, "Video Fish."

NAM JUNE PAIK
"Nobody lost money by underestimating the Americans' taste."

NARRATOR
He especially shocked audiences in the late 60's and 70's, when classical cellist Charlotte Moorman participated in "TV Bra for Living Sculpture." She played a piece he wrote for the cello. Although his art was electrifying and may have surprised audiences, in real life Paik was very down to earth.

NAM JUNE PAIK
"I'm kind of a humble guy. . . modest."

NARRATOR
At the 2000 exhibit, Paik said he thought he had gone as far as he could with video and started experimenting with lasers. He constructed a waterfall in the rotunda of the Guggenheim and had laser lights zigzagging through it. Some may question what is art, but Paik had a very simple definition.

NAM JUNE PAIK
"Art is what pleases me at this moment."

NARRATOR
For more than forty years Nam June Paik expanded the definition of what art can be and changed the way we look at television. He died of natural causes.

[한글 관련기사]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비디오 예술의 거장 백남준씨가 최근 73세의 나이로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타계했습니다. 백씨의 장례식이 3일 뉴욕에서 열릴 예정인가운데 세계 유수의 예술가들이 그의 죽음에 깊은 애도를 표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엔 백씨가 세계 예술계에 남긴 업적과 주요 작품들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

문: 비디오 아트에 관해 아직 생소해 하실 분들이 많으실 것 같은데 잠시 소개해주시죠

답: 쉽게 말씀 드리자면 비디오 영상을 일반 미술과 사진, 레이저 등 일상의 여러 장치와 결합시켜 다양한 효과를 만들어 내는 현대 종합 예술의 하나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가 텔레비젼 광고나 뮤직 비디오에서 흔힐 볼 수 있는 빠르게 편집된 영상들이 모두 비디오 아트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러한 예술 영역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개척한 사람이 바로 백남준씨입니다.

그래서 현대 예술가들은 백씨를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문: 백씨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극찬을 받고 있는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어떻게 얘기하고 있습니까?

답: 예술 비평가들은 백씨의 천재성을 지적하며 그가 동시대의 예술가들보다 적어도 10년에서 20년이상 앞서 갔던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텔레비젼 등 첨단 기술의 위력을 미리 감지하고 문화와 기술을 예술에 접목시켜 새로운 아름다움을 개척했을 뿐 아니라 첨단 기술의 발달속에 인간이 겪는 내면 세계의 갈등과 환희를 작품으로 표출했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백씨가 1974년 완성한 ‘전자 고속도로’는 21세기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즉 전세계가 인터넷 등 여러 통신 기술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는 세상을 미리 예고한 그의 수작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뉴욕 타임스는 최근 백씨의 사망 소식을 상세히 전하며 그를 ‘문화적 벽을 깨뜨린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로 지칭하기도 했습니다.

문: 백씨가 이렇게 세계 예술계의 거장으로 떠오르게된 배경에는 어떤 요소들이 있습니까?

답: 여러 이유들이 있습니다만 백씨의 가정 환경과 동료 예술가들의 지원, 무엇보다 새로운 것을 계속 추구하려는 그의 천재적 열정에 있다고 평론가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백씨는 1932년 매우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피아노와 여러 악기들을 배우며 컸습니다.

일부 평론가와 언론들은 그가 부자집 아들로 구김살 없이 컸기 때문에 동시대의 다른 한국인과는 달리 모든 것을 수용하는 열린 마음을 어려서부터 가졌을 것이라고 말하기도합니다.

1956년 동경대학을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을 간 백남준씨는 그 곳에서 개념 미술의 거장 요셉 보이스 전위 음악가 존 케지지 등과 사귀면서 현대 예술 세계에 눈을 떴습니다.

문: 백씨가 서양 예술계에 처음으로 이름을 올리기 시작한 시기도 이 때쯤이죠?

답: 그렇습니다. 백씨는 1960년대 여러 소리들과 행위들을 묶어 신비적인 효과를 만들어내는 전위 예술 운동 ‘플럭서스’(Fluxus) 에 매료돼 이 집단에 들어가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예를들어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바이올린을 부수는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공연을 펼쳤을뿐 아니라 1960년 쾰른 공연에서는 객석에서 갑자기 무대로 뛰어 들어가 공연을 하던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잘라 주류 예술계의 총아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백씨는 6년 전 저희 VOA 방송과의 대담에서 당시의 공연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백남준씨는 플럭서스에 빠져있던 자신과 동료들은 당시 실존하는 모든것을 비판하길 원했다며 시대의 모든 의문들이 공연에 담겨지길 희망했다고 말했습니다.

백씨는 그 밖에 토마토 주스와 잉크를 온몸으로 뒤집어쓰고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가하면 1963년에는 세계 최초로 텔레비젼을 동원해 전위 예술을 펼쳐 보였습니다. 1965년 활동지를 뉴욕으로 옮긴 백씨는 뉴욕 보니노 갤러리에서 카메라 영상을 접목시킨 최초의 작품을 선보여 이후 비디오 아트의 개척자 또는 아버지로 불리게 됐습니다.

문: 백씨의 작품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들을 몇 가지 소개해주시겠습니까?

답: 백씨는 지난 2000년 뉴욕의 세계적인 박물관인 구겐하임에서 대대적인 개인 회고전을 열었습니다. 당시 전시된 작품들 가운데 ‘로봇 가족’ 이란 작품이 주목을 끌었는데요. 오래된 텔레비젼과 라디오를 인간의 모습으로 만들어 증조 할아버지 부터 세대별로 아기 로봇까지 전시해 그의 천재적 발상이 녹슬지 않았다는 찬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 밖에 수족관과 텔레비젼을 접목시킨 ‘비디오 물고기’란 작품, 그리고 빛과 이미지를 레이저와 모니터를 통해 지그재그로 연결시킨 작품등이 수작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백씨는 특히 1996년 뇌졸증으로 왼쪽 몸을 쓰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왕성한 활동을 벌였고, 숨을 거두기 전까지 한국 소녀에 관한 ‘엄마’라는 작품을 마무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진한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문: 노년에 접어들면서 한국의 정서를 반영한 작품을 자주 만드는 등 조국을 몹시 그리워했다고 하는데…마지막 작품을 완성하지 못해 참 아쉽군요…..장례식이 곧 열릴 예정이죠?

답: 네 장례식은 3일 뉴욕의 프랭크 캠벨 장례식장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유족들은 백남준씨가 어느 한 나라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세계인이라며 유해도 화장된 후 한국과 미국 독일 등에 분산 안치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한편, 유족들은 백남준씨의 작품 2점(US Map, Megatron Matrix)이 이곳 워싱턴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영구 전시될 예정이라고 덧붙였습니다.

XS
SM
MD
L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