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출신 피아니스트 김철웅(32세, 2003년 입국) 씨는 음악의 자유를 찾아 2001년 북한을 탈출했습니다. “음악은 나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김철웅 씨에게 자신을 표현할 수도 또 좋아하는 음악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북한의 현실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김 씨는 “북한에서는 김일성, 김정일 찬양곡 이외에는 연주할 수 없으며, 클래식도 1899년도 이전의 작품만 연주할 수 있다”면서 “음악가로서 다양한 음악을 접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탈북하게 됐다”고 탈북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김철웅 씨가 탈북하게 된 데는 재즈가 한몫을 했습니다.
인터뷰1) “거기서는 재즈라고 그러지 않고 자즈라고 그러거든요. 자즈라 그러든데, 자즈를 미국식 재즈라고 해가지고 반동적 자즈해가지고 듣기만 해도 잡아가는 불법인 그런 경우가 있다 보니까 그걸 원해서 탈북을 한 만큼 그렇게 되네요 특히 김철웅 씨의 탈북에 결정적인 동기를 부여한 것은 1995년 러시아 유학 중 들은 클래식 재즈 피아니스트 리처드 클레이더만의 곡이었습니다.
인터뷰2) 클레이더만 음악 다른 나라들에는 널리 알려져 익숙한 클레이더만의 곡을 들으면서 김철웅 씨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몸에 전율이라는 걸 느꼈다”고 합니다.
인터뷰3)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음악으로서의 그 어떤 인간한테 주는 전율성이라고 할 까요. 너무 청순하고 맑고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 듯한 감 있잖아요,” 계속해서 김철웅 씨가 북한에서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김철웅 씨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북한 또한 자식을 잘 교육시키려는 부모의 마음은 똑 같다면서, 북한에서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부모님의 욕심이 크게 작용했다고 소개했습니다. 1980년대 초 북한에서 예술인이 대우를 받기 시작하자 김씨의 부모도 자식 교육에 욕심을 내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김철웅 씨는 8살에 평양음악무용대학 입학시험을 치르게 되었고 피아노 부문에 입학을 하게 됩니다. 평양음악무용대학은 누구나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음악적 능력뿐 아니라 신체적 조건, 부모님의 직업, 출신성분까지 검토하기 때문입니다. 김철웅 씨는 입학시험이 16차례에 걸쳐 치러졌다면서 입학 당시 9명을 뽑는데 6000명이 지원했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고 설명했습니다.
평양음대를 졸업한 김철웅 씨는 러시아 차이코프스키국립음악원으로 유학을 다녀왔고 이 곳에서 음악의 영역과 견문을 넓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곳에서 자신의 운명을 흔들 음악적 충격을 경험하게된 것입니다. 음악을 하기 위해 북한 최고의 명문인 평양음대와 외국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음악”을 위해 탈북했다는 김철웅 씨, 그의 말 속에서 북한의 현실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됩니다.
요즘 김철웅 씨는 공연과 대학출강, 대학원 준비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2004년부터 한세대에서 음대 교수로 일하고 있고 이곳 저곳에서 들어오는 공연 요청을 소화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바쁜 와중에도 피아노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인터뷰4) “최고가 되기가 힘들고요 최고가 된 다음에는 유지하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항상 사람이 보석도 닦지 않으면 빛이 안 나듯이 자신이 보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더 열심히 닦지요.” 김철웅 씨는 한국에 와서 한 가지 목표를 세웠습니다. 남북한의 문화적 통합을 위해 기여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인터뷰5) “양 국가를 다 걸쳐 지금 감수하고 있는 피아니스트로서 그 어떤 문화의 통일을 저 하나의 힘이라도 적은 힘이나마 보탬을 주고 싶은 마음이 많고요 분단의 아픔을 감수함으로써 통일을 이끌어가는 그런 문화인의 한 사람이 되고자 하면서 앞으로의 삶도 그것과 함께 살아가려고 합니다.”
우리 민족이 통일을 이루려면 문화적 통합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김철웅 씨, 그는 힘으로 하지 못하는 것을 문화는 할 수 있고, 사람의 생각을 바꿀 수도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런 김철웅 씨에게 이제 피아노는 단순한 악기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보내드린 탈북자 통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