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여성 이미숙(가명, 43세, 2001년 탈북) 씨는 현재 중국에서 가정보모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씨는 고향에서 살기가 힘들어 2001년 회령쪽으로 장사를 나왔다가 손해를 본 후 중국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탈북을 했습니다. 식당일과 가정보모로 생계를 꾸려가던 이씨는 2003년 한국행을 시도하던 중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북송되었습니다.
한달간의 보위부 조사 끝에 단순 탈북자로 처리된 이씨는 보안서 구류장으로 이동, 그리고 고향으로 후송되어 노동단련대에서 6개월동안 강제 노동을 받았습니다. 2003년 가을에 북한 보위부에 인계된 이미숙 씨는 보위부 구류장에 수감되었습니다. 보위원들은 탈북자들을 인계받자마자 쌍욕을 퍼부으며 옷을 몽땅 벗기고 몸수색을 했습니다.
보위원들은 여자들은 크게 때리진 않았지만 말을 듣지 않거나 심문에 비협조적일 때는 주먹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숙 씨는 여자라도 가족과 함께 잡혀 왔을 경우에는 심문 내용이 틀릴 경우 혁띠로 마구 때리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여자들과 달리 남자들은 가혹한 대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특히 이미숙 씨는 “여자들은 덜 하지만 한국건에 들어간 아이들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습니다. [인터뷰1.이미숙] “한국건만 아니면 보안성에 다 넘기니까. 우리는 그저 중국 가서 고스란히 있다 왔으니까. 그 다음에 남자애들 있단 말이에요. 남자애들 한국 건은 개념 없어요. 계속 취급(취조)받고 절반 죽지요 뭐 거기서.” 이미숙 씨는 단순 탈북자로 처리되어 구타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자세로 앉아 있는 등 구류장 생활은 참기 힘들만큼 고통스러웠다고 떠올렸습니다.
[인터뷰2.이] “보위부에서 이렇게 딱 앉아서 아침 6시에 기상해서 밤 10시까지 있는 단 말이에요. 있는데 그 고통을 참아내기 힘들지요. 먹는데서 먹을 게 너무 한심하니까 참을 수가 없지요.” 그나마 보위부 구류장은 나은 편이었습니다. 보안서 구류장은 더 열악했습니다.
[인터뷰3.이] “고저 썩은 통강냉이 삶아서 요만한 식기에다 한 숟가라씩 주고 물이 없어서 그 앞에 이만한 우물, 두레박으로 파서, 씨라지(시레기)도 절쿤 것 썩은 씨라지 있잖아요. 모래가 그저 (자글자글).. 그거 그렇게 주고 계속 일하러 나간단 말이에요. 그때 김장철이니까 뭐 배추전투도 나가고 아파트 건설한 데도 나가고.” 생활환경도 열악했습니다. 세면장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캄캄했고 겨울철이었지만 온수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침 6시에 일어나서 밤 늦게까지 늘 강제노역에 시달리면서도 통강냉이 2-3 숟가락과 모래가 자글자글한 소금국만을 제공받았습니다. 또한 숙소는 이와 빈대, 벼룩이 들끓어 잠을 자기도 어려웠습니다. 난방도 안 되는 방에서 담요 몇 장에 수십명의 사람들이 웅크리고 자야했습니다. 열악한 환경, 불량한 음식 공급, 강제노역 등으로 사람들은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미숙 씨는 그때를 떠올리면 “끔찍하다”면서 중국 감옥은 그렇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인터뷰4.이] “막 끔찍해요. 그저 말로 이렇게 해도 실제 체험하면 상상도 못해요. 중국이 얼마나 깨끗해요. 이가 하나 있길 하나, 중국 감옥에서도 이밥에 고깃국 주지 뭐, 일하는 것 하나도 없고, 말도 다 못하지요. 상상도 못해.” 보안서 구류장에서 1달 동안 수감되어 조사를 끝낸 이미숙 씨는 2004년 초에 노동단련대로 이송, 6개월 동안 강제노역을 했습니다.
이곳 환경 또한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열악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탈북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8개월 동안 시달린 이미숙 씨는 상한 몸으로 자식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집에는 먹을 쌀 한 톨이 없었습니다. 이 씨는 자식들의 생계를 위해 2004년 9월 다시 탈북을 감행합니다.
[인터뷰5.이] “내가 잡혀나갔다 왔으니까 집에 뭐 있어요. 우리 나그네(남편) 1월 달에 죽었지, 아이들 둘이 있지, 신발도 한심하지 옷도 한심하지. 우선 먹을 쌀이 어디 있어요. 엄마가 또 그렇게 (중국에) 몇 년씩 있다가 잡혀 나왔으니까. 그래서 할 수 없이 내가 도로 (중국에) 들어왔지요. 아휴 못 살겠어요. 물 안 나오지, 전기 안 오지 뭐, 아휴 그래서 다시 또 (중국에) 들어왔어요.”
이미숙 씨는 중국에서 가정보모로 받는 월급 700원(중국돈)을 거의 쓰지 않고 저축을 합니다. 북한에 남아있는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밖에도 거의 나가질 않습니다.
[인터뷰6.이] “거의 안 나가요. 그러니까 불법으로 왔으니까 항상 주의하지요. 말도 주의하고 걸어가는 것도 주의하고, 한번 (북한에) 잡혀갔다오니까 더 무섭다 말이에요. 용서 없어요. 그때는 감옥이야요. 이번에 잡혀 갔을 때 거기서(북한에서) 감시 붙어서 항상 인민반장이 집에 와서 (내가) 없어졌나 안 없어졌다 보고 내내 이랬는데 뭐. 안돼요. 이제는 용서 없어요. 이제 잡혀가면.”
지금 이미숙 씨에게는 북한에 있는 아들이 배불리 먹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게 가장 큰 소망입니다.
[인터뷰7.이] “보고 싶지요 뭐. 아들 보고 싶어서 죽겠어요. 우선 첫째 굶지나 않은지. 그저 굶지 않은지 그것부터 생각해요. 좀 배불리 먹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 생각 뿐이에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이씨, 그녀는 오로지 당장 돈을 벌어서 북한에 있는 자식들을 도와줄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인터뷰8.이] “앞으로 글쎄 한국을, 아들만 들어오면 내갈 한국 갈 결심이 되어 있는데 아들들이 언제 들어오겠는지, 그저 그것도 좀 우려되고 또 이제 앞으로 돈 좀 많이 벌어서 아이들을 보태줄 생각 뿐이에요.”
지금까지 서울에서 보내드린 탈북자 통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