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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림 견디다 못해 탈북한 18세 탈북소년, 변종혁군 [탈북자 통신:김민수]


북한에서의 굶주림을 견디다못해 6번의 탈출 시도끝에 마침내, 라오스와 태국 그리고 미얀마를 거쳐 2004년 1월 한국에 입국해 최근 북한에서의 체험을 수기로 엮어 한국 주요 언론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18세 탈북소년, 변종혁군을 서울에 있는 [김민수]통신원이 만나보았습니다.

6번의 탈북시도 끝에, 라오스-태국-미얀마를 거쳐 마침내 2004년 1월에 한국에 입국한 한 탈북 청소년의 수기가 여러 신문에 소개되는 등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화제의 주인공은 함경북도 회령이 고향인 변종혁(18세) 군, 그는 인터넷을 통해 연재한 자신의 탈북 수기가 이렇게 큰 관심을 끌게 될지는 몰랐다며 “참 많이 놀랍고, 뜻하지 않게 이렇게 돼서 당황스럽다”고 심경을 밝혔습니다. 변군은 사람들이 자신의 수기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남한 사람들과 다른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음-, 남한 사람들보다 다른 방식으로 다른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구나 그래서 아닐까요.”

사람들이 변종혁 군의 수기에 그렇게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단순히 “환경의 차이” 때문이 아닙니다. 상상하기 힘든 온갖 어려움들을 겪고도 구김살 없이 웃음을 짓는 변군의 환한 모습 때문입니다. 10대 후반의 변군이 어떻게 6번이나 탈북을 했고, 한국에까지 오게 되었는지 지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변종혁 군이 탈북하기 전 북한의 상황은 극심한 식량난으로 온 주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북한 당국은 식량난 시기를 ‘고난의 행군’이라고 명명하고 주민들에게 내핍을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행군’은 대량의 아사자가 발생했지만 끝날 줄 몰랐습니다. 오히려 98년에는 ‘강행군’이라며 이제는 달리며 행군할 것을 주민들에게 요구했습니다. 변종혁 군은 이 시기를 온몸으로 살아내야 했습니다.

겨우 11살이었던 변종혁 군은 각각 1살씩 차이가 나는 누나.동생과 함께 밭과 논을 부지런히 다녔습니다. 땅에 떨어진 이삭을 줍고, 강냉이를 줍고, 콩 등을 주워 절구에 찧어 물을 가득 붓고 멀건 죽을 먹으며 하루하루를 연명했습니다.

변군은 배고 고파 힘이 없었지만 “살기 위해, 살 자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일”을 했다고 합니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해 내다팔고, 회령 성남에서 유선까지 두 시간 반을 걸어 자기몸무게 만큼의 석탄을 구해와 다시 두 시간 반을 되돌아와 장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변군은 “내가 키가 작은 이유는 많겠지만 어릴 적에 무거운 짐들을 너무 많이 져서, 또 많이 먹지 못해서 키가 작은 것 같기도 하다”고 담담히 말합니다.

고통스런 나날이 많았지만 변종혁 군에게 가장 힘들었던 기억 중 하나는 식량을 구할 수 없었던 98년의 겨울이었다고 합니다. 굶주리다 못한 변군의 어머니가 “앉아서 죽는 것 보다는 그래도 죽을 각오를 하고 중국에 갔다 와야 하겠다”며 식량을 구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그러나 식량을 구하러 간 어머니는 쉬이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변변한 옷도 없어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물로 배를 채우며 꼼짝없이 1주일을 굶을 수밖에 없었던 3남매는 먹을 생각, 엄마 생각, 잘 먹었던 때를 되새기며 의식이 몽롱해져 갔습니다.

“우리 형제들은 그때 일주일을 굶은 거지요. 그때 일주일을 굶었는데 그냥 겨울이니까 어디 나가면 춥잖아요. 옷도 없거든요. 그냥 이불속에 가만히 있으면서 그냥 먹을 생각, 엄마 생각, 우리 잘먹었던 그때 뭐 그런 때를 계속 상상하면서 계속 거기에 빠지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이 거의 정신이 없어지더라구요.”

숟가락 들 힘조차 없을 때 옆집 할머니가 “이대로 있다간 죽는다며” 까마치(누룽지)를 들고 와서야 죽을 써서 나눠 먹고 정신을 차렸다고 합니다.

결국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3남매는 뿔뿔이 헤어지게 됩니다. 99년 12살이었던 변종혁 군은 무작정 두만강을 넘었습니다. 당시의 심정을 들어보겠습니다.

“여기서 내가 안 넘어가면 죽을 것이고 여기서 넘어가면 나는 살 것이다. 뭐 이런 생각으로 죽고 살자의 정신으로 건너간 것 같애요.”

어머니가 귀에 못이 박히게 말했던 큰아버지 집의 전화번호만을 의지한 채 두만강을 건넌 변종혁 군은 중국에서 예상치 못한 행운(?)을 만나게 됩니다. 큰아버지가 살고 있는 곳을 찾아 무작정 걷고 있는 데 옥수수 낱알이 길에 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변군은 그것을 보고 중국이 “진짜 잘 사는 나라”로 생각했습니다.

주머니란 주머니에 옥수수 낱알을 가득 채우던 변군은 순간 그곳이 중국이라는 것도 잊고 “이 옥수수를 주어서 다시 북한으로 갈까”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때 이런 생각을 했어요. 배낭을 하나 구해다가 이 옥수수를 주어서 다시 북한으로 갈까 뭐 이런 생각도 했거든요. 그럴 정도로 널린게 식량이었고 중국은, 그래서 참 놀랐던 것 같아요.”

어렵게 큰아버지를 만나 얼마간의 돈을 얻은 변종혁 군은 동생과 누나를 데리러 다시 북한으로 들어갔습니다. 회령에 도착한 후 동생이 있을 만한 데는 곳곳을 뒤지고 다녔다는 변군, 그리고 기차 대합실에서 동생과 마주쳤습니다.

“그때 심정은 참 웅클했고요 내 동생이니까. 더구나 못 입은 데다가 땅 바닥을 보면서 먹을 것 없나 두리번 두리번 거리면서 그랬던 것이 제일 마음에 걸렸어요. 제 심정을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그냥 많이 슬펐고 그냥 많이 기뻤고....”

누나와 동생을 데려 오기 위해 강제북송과 재탈북을 감행했던 12살의 변종혁 군, 그는 어떤 순간에도 희망을 버려본 적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변군의 수기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그의 얼굴에서 ‘희망’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보내드린 탈북자 통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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