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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자들의 공직요청을 뒤로하고 전직병사들을 감싸안은 잭슨대통령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은1829년 3월에 미국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를 지지하는 수천명의 사람들이 그의 대통령 임명식을 보기 위해 워싱턴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그중의 많은 이들은 단지 공직을 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워싱턴에 왔습니다. 그들은 잭슨 대통령이 선거에서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공직자들을 해고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잭슨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해고하고 남은 공직을 차지하기를 원했습니다.

대부분의 일자리는 존 맥클레인(JOHN MCLEAN)이 장관으로 있는 체신국에 있었습니다. 맥클레인은 잭슨에게 선거에 관여한 우체국장들을 해고 시켜야 된다면 존 퀸시 아담스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 일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잭슨을 위해 일했던 사람들도 해고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잭슨은 맥클레인을 체신부 장관에서 해고하고 월리엄 배리( William Barry)를 새로운 체신부 장관으로 임명했습니다. 배리는 우체국장 자리를 잭슨 지지자들에게 줄 용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또한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은 사람들의 직위를 빼앗는 조치를 취할수 없었습니다.

많은 공직자들은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그들중 일부는 일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연로하고 몇몇 사람들은 술주정뱅이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공금을 횡령하기까지도 했습니다. 잭슨 대통령은 그러한 사람들은 해고 시켰으면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일자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자리를 빼앗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한 노인은 뉴욕에 위치한 알바니 (Albany)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잭슨에게 그가 그 도시에서 우체국장을 맡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정치인들이 그의 직책을 탐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노인은 생계를 꾸려나갈 다른 수단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대통령이 대답을 하지 않자 그 노인은 그의 외투를 벗으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나의 상처를 보여주겠습니다. 나는 독립전쟁 당시 조지 워싱턴 장군과 함께 싸우면서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 다음날, 한 뉴욕 의원이 잭슨 대통령에게 공직에서 해고해야 할 사람들이 적혀 있는 명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알바니에서 온 노인이 그 명단에 있었습니다. 그 노인은 투표에서 잭슨을 찍지 않았었습니다. “그의 몸에 영국과 대항하다가 입은 상처가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어떠한 경우에도 나는 그 노인을 해고할 수 없습니다.” 잭슨이 소려쳤습니다.

다른 전직 병사의 일자리도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 사람은 여러 가족을 부양해야 했고 다른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독립전쟁에서 다리 하나를 잃었습니다. 그 또한 잭슨에게 표를 던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잭슨 대통령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만약 그가 조국을 위해 싸우다가 다리를 잃었다면 그것은 지지투표 이상으로 나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계속 그의 일자리를 지킬 것입니다.” 공직을 구하지 못한 잭슨의 지지자들은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잭슨 대통령은 그와 부통령 존 칼훈 (John C. Calhoun)과의 갈등을 해결해야 했습니다. 둘간의 갈등은 내각에서의 갈등으로 커져 갔습니다. 내각의 3명의 각료들은 칼훈의 지지자이자 친구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샤뮤엘 이감( Samuel Ingham) 재무장관, 존 버렌( John Berrien) 법무장관, 그리고 존 브랜치 (John Branch) 해군 장관이었습니다. 내각을 구성하고 있는 마틴 반 뷰런 (Martin Van Buren) 국무부 장관은 칼훈에 반대했습니다.

내각을 구성하고 있는 또 다른 이로는 잭슨의 절친한 친구인 존 이튼(John Eaton)이 있었습니다. 이튼은 잭슨이 대통령이 되기 몇달전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와 그의 젊은 부인은 그들이 결혼하기전에 동거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칼훈 부통령은 이것을 문제삼아 이튼을 내각에서 몰아 내려했습니다. 칼훈 부통령은 이튼 부인을 개인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칼훈의 부인과 3명의 각료 부인들은 이튼 부인과 어떠한 일도 함께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잭슨 대통령은 이에 매우 노했습니다. 왜냐하면 젊은 이튼 부인에 호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잭슨과 칼훈과의 갈등은 다른 문제로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잭슨은 칼훈이 제임스 몬로 (James Monroe) 전 대통령의 전 각료시절 잭슨을 체포할 것을 요구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칼훈은 1818년에 잭슨이 스페인령이었던 풀로리다에 군사 공격을 가한 이유로 잭슨을 처벌하기를 원했었습니다. 둘간의 반목은 각 주의 권리가 연방정부의 권리보다 강해야 한다는 칼훈의 신념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칼훈의 그러한 신념은 국회에 상정된 한 법안을 둘러싼 논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828년 의회는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하는 법안을 통화시켰습니다. 관세부과의 목적은 미국 공업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남부는 공업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 법안에 반대했습니다. 남부는 농업지역이었습니다. 수입관세는 남부가 수입하는 품목의 가격을 올리는 효과만 가져올 뿐이었습니다. 남부는 수입관세는 헌법에 위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남부는 헌법이 연방정부에게 보호관세를 제정할 권리를 주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칼훈이 거주하는 사우스 캐롤나이나 주는 수입관세를 내기 거부했습니다. 칼훈은 사우스 캐롤나이나의 조치를 정당화하는 긴 성명서를 작성했습니다. 성명서에서 그는 “무효의 원리”라고 불리우는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이 원리에 따르면 연방정부는 최고의 권한을 갖지 못했습니다.

칼훈은 연방정부가 독립된 주들의 합의에 의해 생겨났다고 지적하면서 그 합의가 곧 헌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주의 권한과 연방 정부의 권한은 분배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의 권한은 최고 권한으로써, 분배될 수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칼훈은 최고 권한은 각주에게 주어졌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각 주들이 헌법을 비준할때 이 최고 권한을 양도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주와 연방정부 사이의 어떠한 분쟁에서도 주가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연방정부가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 법안을 통과시키면, 그 법안은 무효화되어 효력이 없어져서 아무런 권한도 갖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다음 칼훈은 법이 헌법에 합치되는지를 결정하는 방법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는 그러한 결정권은 각 주들에게 주어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대법원도 연방정부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러한 권한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말했습니다. 칼훈은 어떠한 주도 연방정부가 통과시킨 특정 법안이 헌법에 합치되지 않고, 그 주 이익에 배치가 된다고 생각이 들면 그 주는 그 법안을 일시 정지 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게할 경우 다른 주들은 그 법안의 합헌성에 대한 문제에 대해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2/3 이상의 주들이 법안을 승인하면, 그 법안을 반대하는 주는 그 법안을 받아 들이든지 연방정부로부터 탈퇴해야 했습니다. 만약 승인하는 주들이 2/3에 못 미치면 그 법안은 폐기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어떠한 주라도 그 법을 준수할 필요가 없으며 법안은 무효화 되었습니다.

무효화 이론은 상원에서 매샤츄샤트 출신의 다니엘 웝스터 (Daneiel Webster)와 사우스 캐롤라이나 출신인 로버트 헤인 (Robert Hayne) 사이에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헤인이 먼저 말했습니다. 그는 연방정부에게 막대한 권한을 주는 것보다 더 큰 악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연설의 요점은 다음 몇 마디로 요약 될 수 있었습니다. ‘선 자유, 후 연방’이 그것이었습니다. 웝스터가 이를 반박했습니다. 그는 헌법은 각 주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헌법은 각주의 합의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헌법은 자연법이고, 최고의 권한은 주와 연방정부에게 배분될 수 있으며, 연방 정부는 국민들로부터 통치권을 부여 받았다고 웝스터는 말했습니다.

웝스터는 각주들은 연방정부의 법안을 거부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며 연방으로부터 탈퇴할 권한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만약 한 주와 연방정부 사이에 분쟁이 생겼을 경우에는 그 분쟁은 미합중국의 최고법원에 의한 중재에 의해 해결되어야 한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웝스터는 헤인이 ‘선 자유, 후 연방’ 이라는 단어를 어리석게 사용했다고 말했습니다. 웝스터는 자유와 연방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도 잭슨 대통령이 무효화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는 논쟁이 벌어지는 동안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가 칼훈의 이론은 지지했을까 아니면 웝스터의 생각을 지지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편에서 전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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