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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런 부인의 죽음속에 대통령으로 취임한 앤드류 잭슨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 장군은1828년에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그는 선거운동의 치열한 비방전끝에 죤 퀸시 아담스JOHN QUINCY ADAMS를 물리치고 당선됐습니다. 선거운동중 잭슨에 대한 비방중 하나는 그의 부인과 관련된 문제였습니다. 상대 후보측은 잭슨이 남의 여자를 빼앗아 부인으로 삼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전 남편과 정식으로 이혼도 하지 않은 라첼RACHEL과 잭슨이 결혼을 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 남편이 이혼을 완전하게 처리하지도 않았으면서, 정리가 됐다고 말함으로써 빚어진 일이었습니다.

그같은 혼란을 알게된 잭슨과 라첼은 그후 합법적으로 다시 결혼을 했었습니다. 선거 운동중의 그같은 논란은 라첼을 깊은 고통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라첼은 단순하고 친절한 여인이었습니다. 라첼은 잭슨의 대통령 당선이 매우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라첼은 대통령 부인으로써 살아가야할 삶에 대해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라첼은 처음에는 워싱턴으로 가지않고 테네시에 머물러 살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남편곁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워싱턴으로 가야했습니다. 따라서 라첼은 워싱턴으로 이사갈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여러주에 걸쳐 잭슨의 집은 분주했습니다. 라첼은 쉴틈이 없었습니다. 라첼의 건강은 악화된듯 했습니다.

워싱턴으로 떠기 불과 며칠전인 12월 17일, 의사 두명이 내쉬빌NASHVILLE 외곽에 있는 잭슨의 집으로 급히 달려갔습니다. 의사들은 라첼이 심한 통증을 갖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라첼은 심장 마비를 일으킨듯 했습니다. 의사의 치료를 받고 라첼은 잠시 좋아진듯했습니다. 하루 이틀도안 라첼은 앉기도 하고 친구들과 대화도 했습니다. 라첼은 즐거운것 같았습니다. 잭슨은 대부분 시간을 라첼 곁에서 보냈습니다.

그주 일요일 라첼은 너무 오래 앉아 있다가 병세가 악화됐습니다. 그러나 의사들은 부인이 심각하지는 않다면서 잭슨에게 좀 쉬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다음날 내쉬빌에 나갈 예정이었습니다. 잭슨이 옆방에서 잠을 자고 있을때, 라첼은 하녀에게 자신을 다시 일으켜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라첼의 마음은 여러해 동안 워싱턴에서 지낼일이 걱정됐습니다. 라첼은 “나는 워싱턴의 궁전에서 사는 것 보다 차라리 하느님의 집에서 문지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날밤 10시가 조금 넘어 라첼은 고함을 지르며 의자에서 떨어졌습니다. 하녀가 소리치는 소리에 온 식구가 잠을 깼습니다. 맨처음 라첼에게 달려간 사람은 잭슨이었습니다. 잭슨은 부인을 들어 침대에 눕혔습니다. 그는 의사들이 라첼을 진료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잭슨은 의사들의 눈에서 라첼의 생명이 다했다는 것을 짐작할수 있었습니다.

잭슨은 믿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라첼의 옆에 앉아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잭슨은 친구 죤 커피(JOHN COFFEE)에게 “죤, 라첼이 죽었다는 것이 실감이 나? 나는 절대로 믿을수가 없어!”라고 말했습니다. 레이첼은 이틀후에 묻혔습니다. 만명이라는 인파가 잭슨집에서 열린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월리엄 흄(WILLIAM HUME) 목사는 단지 레이첼 잭슨의 생애에 관해 이야기 했습니다. 그는 그녀의 친철함과 겸손함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흄목사는 그녀가 사람들이 선거 운동기간 동안 그녀에게 심한 비방을 함으로써 상처를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잭슨은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목사가 설교를 마쳤을때, 잭슨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성령의 임재함으로, 나는 나의 모든 적들을 용서할 수 있고, 또한 용서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 대해 거짓되게 그녀에게 악의에 가득찬 비방을 한 사람들은 하느님에게 자비를 구할 지어다.”

잭슨은 선거기간 동안 레이첼에 대한 비열한 비방들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며칠 후 한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전지 전능한 하나님, 그녀의 살인자들을 용서하옵소서. 저는 그녀가 그들을 용서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저는 결코 그들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잭슨은 워싱턴으로 긴 여정을 떠나기 위해 1월 18일에 그의 집을 나서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가슴은 무척 아픔니다. 저는 활기를 다시 찾기가 어렵습니다.”

워싱턴에 있는 사람들은 상황이 어떻게 될것인지 짐작할수가 없었습니다. 다니엘 웝스터( Daniel Webster) 상원의원은 보스턴에 있는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습니다. “잭슨 장군은 2월 15일경에 올 것입니다. 아무도 그가 와서 어떤 행동을 보일지 모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그는 이곳에 도착하면 큰 반향을 일으킬 것입니다. 저는 그가 어떠한 반향을 일으킬지는 모르나 저는 희망보다는 두려움이 앞섭니다.”

잭슨의 지지자들은 수도에 도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몇몇 사람들은 잭슨이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모습을 보기를 바랬습니다. 그중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공직을 구하기를 바랬고 또한 그렇게 기대했습니다.

2월 12일, 잭슨 장군은 워싱턴에서 포토맥( Potomac) 강 건너에 버지니아주에 위치한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크고 날렵한 체구로 얼굴에는 주름이 있었고, 그의 큰 이마에 머리를 뒤로 제낀 백발의 소유자였습니다. 항상 예리하고 위엄이 있던 눈매에는 비애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잭슨의 건강 상태는 한번도 좋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2년전에 입는 결투에서 입은 상처로 몸에 2발의 총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몸 상태가 극심히 좋지 않을 때도 계속적으로 활동을 할 만큼 매우 강인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3주동안 잭슨 장군은 그의 참모와 동료들을 만나면서 그의 내각을 형성할 사람들을 선정했습니다.

국무 장관직에 잭슨은 정치적으로 매우 유능한 뉴욕 출신의 마틴 반 뷰렌(MARTIN VAN BUREN)을 임명했습니다. 그는 재무부장관직에는 펜실베니아 사업가 출신의 사뮤엘 이감씨 (SAMUEL INGHAM) 를, 법무부 장관직에는 조지아 출신의 존 버렌(JOHN BERRIEN OF GEORGIA)를, 해군 장관직으로는 전상원의원이자 전 노스캐럴라니아의 주지사 출신의 존 브랜치 (JOHN BRANCH )를, 전쟁 장관직에는 그의 오랜 친구인 테네씨의 존 이톤 (JOHN EATON )을 각각 임명했습니다.

내각의 뷰렌( Berrien) 장관, 브랜치(Branch) 장관, 그리고 이감(Ingham) 장관은 잭슨 내각의 존 칼훈 부통령과 친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칼훈은 잭슨 대통령이 4년이나 8년후 대통령직에서 물어난 후 대통령이 되고자 했습니다 .마틴 반 뷰렌 ( Martin Van Buren) 또한 대통령직에 욕심을 가졌기 때문에 그는 칼훈 부통령의 야심을 방해하고자 모든 수단을 동원하려고 했습니다.

앤드류 잭슨는 3월 4일에 대통령에 공식적으로 취임했습니다. 존 퀸씨 아담스 (JOHN QUINCY ADAMS) 대통령은 국회의사당 (CAPITOL BUILDING)에서 수행된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잭슨은 아담스와 가까이 하지 않겠다고 공공연히 말했었고, 그는 아담스 전 대통령이 백악관에 있는 동안, 전통에 따라 신임 대통령이 백안관을 방문하는 행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잭슨은 여전히 선거운동 기간 동안 자기 부인에 대한 비방에 무척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그는 아담스 전대통령이 비방에 대해 적어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 3월 4일 워싱턴의 하늘은 구름이 끼었으나, 잭슨 대통령이 국회 건물로 향할때 구름 사이로 햇볕이 비추었습니다. 그의 지지자들은 이를 좋은 징조로 받아들였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행사장에 모여있어 잭슨은 담을 뛰어넘어 후문으로 건물안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는 건물을 통과해서 행사가 거행될 정문쪽의 개방된 장소로 걸어갔습니다.

행사 자체는 단순했습니다. 너무 사람들이 많아서 잭슨의 연설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연설이 끝난 후 존 마샬 (JOHN MARSHALL) 대법원장이 새로운 대통령 선서를 주재했습니다. 인파속에서 캔터키 (KENTUCKY)에서 온 신문기자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잭슨 장군이 대통령이 됨으로써 오늘은 국민들에게 자랑스러운 날이다.” 의사당에서부터, 잭슨대통령은 펜실베니아 거리(PENNSYLVANIA AVENUE)를 통해 백악관으로 향했습니다. 그가 미국의 7번째 대통령이 된 것을 본 사람들이 모두 그의 뒤를 따랐습니다. 사람들은 취임 축하연을 위해 음식과 음료수를 내놓은 백악관까지 그를 따라 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백악관에 한꺼번에 들어가려한 결과 옷들이 찢어지고, 유리와 접시가 깨지고, 의자와 탁자가 파손 되었습니다. 한번도 백악관에서 인파로 매운 축하연이 일어난 것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잭슨은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부딪침이 그를 피곤하게 하였고 그는 그 자리를 빠져 나갔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 ALEXANDRIA )에 묵고 있는 호텔에서 나머지의 하루를 보냈습니다. 백악관으로 찾아온 하객들은 건물밖에 음료수가 마련돼서야 결국 자리를 떴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문 주위가 인파로 가득찼기 때문에 창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갔습니다.

잭슨은 이제 국민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공직을 찾을려는 의도에서 워싱턴에 모두 머물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잭슨이 간 곳마다 일자리를 그에게 묻는 사람들이 항상 있었습니다. 그들은 선거에서 아담스 (Adams)를 지지한 공직자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잭슨장군을 지원했던 사람들로 충원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잭슨이 이 문제에 어떻게 대처했는지는 다음회에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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