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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리한 여건속에 매디슨 대통령 영국과 전쟁 돌입



미국과 영국은 1812년 더욱 전쟁에 가까이 닥아섰습니다. 의회는 미국에 있는 선박들에게 90일 간의 항해 금지 조치를 승인했습니다. 이에 따라 이들 선박은 일체 미국 항을 떠날수 없었습니다. 또한 외국 항에 정박중이거나 바다에 있는 선박들에게는 본국으로 돌아오도록 명령했습니다. 매디슨 대통령은 전쟁이 벌어질 경우 이들 선박이 나포되는 사태를 막기위해 그같은 조치를 요청했습니다.

대통령은 전쟁이 벌어질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는 런던으로부터 어거스타스 포스터 (Augustas Foster) 주미 대표에게 하달한 지시를 보았습니다. 영국 외무장관은 포스터에게 어떠한 타협도 하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포스터는 영국에 적대적인 나라와의 무역에서 중립적 입장을 취하는 것을 영국이 얼마나 강력히 계속 반대할 것인지를 미국이 인식하기를 원했습니다.

매디슨 대통령은 어떤 타협의 조짐이 나타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런 징조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의회는 전쟁에 대한 준비를 계속 추진했습니다. 의회는 군대의 규모를 늘리고 확대된 병력으로 더 많이 필요하게될 자금을 차용하는 안등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러나 의원들 모두가 전쟁을 찬성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많은 연방당원들이 전쟁을 반대했습니다. 이들중 일부는 금수 조치를 시행 1개월만에 해제할 것을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허마너스 블리커(Hermanus Bleecker) 의원은 하원에 자신의 출신구 주민 수백명의 서명이 있는 요청서를 제시했습니다. 그는 이사람들 모두가 무역 봉쇄와 전쟁을 반대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지금부터 60일 후 무역 봉쇄가 끝나면 전쟁을 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의 육군, 해군은 어디있으며, 전쟁을 수행할 자금이 어디 있느냐고 그는 따졌습니다.

앨버트 갈라틴 재무장관은 돈을 빌리는데 애로를 느꼈습니다. 연방당이 세력을 쥐고 있는 뉴잉글랜드 지방의 은행으로부터는 거의 전혀 돈을 빌릴수 없었습니다. 의회는 천 100만 달라를 차용하는 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러나 갈라틴 재무장관은 금융기관이 정부에 차용해줄수 있는 자금은 600만 달라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연방당은 갈라틴의 애로가, 국민들, 특히 뉴잉글랜드 지역 사람들이 전쟁을 반대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공격했습니다. 서부와 남부 사람들이 전쟁을 찬성한다면 자금을 그들이 대도록 하라고 연방당은 몰아세웠습니다.

공화당의 죤 랜돌프도 전쟁 반대 발언을 했습니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세금을 더 부과하라고 명령할 용기가조차 없는 행정부가 어떻게 전쟁을 이야기할수 있습니까. 우리는 자금이 없이, 군대도 없이, 해군도 없이 전쟁을 할 것입니까? 국민은 이것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죤 칼훈(John C. Calhoun) 의원은 랜돌프에게 지금은 준비가 안됐다 하더라도 일단 전쟁이 선포된지 4개월만이면 미국은 영국령 카나다의 대부분을 장악할수 있을 것이라고 맛섰습니다. 영국이 적대적인 자세를 바꾸지 않을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매디슨 대통령은 6월 1일 전쟁을 선포하겠다는비밀 멧세지를 의회에 보냈습니다. 매디슨은 전쟁을 해야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영국의 전함들이 바다에서 미국 선박의 행해를 방해한다. 영국 해군이 미국 선박의 보호를 받는 사람들을 체포 연행한다. 영국 함정은 미국 영해를 침범하고, 미국 항구에 입항 또는 출항을 하면서 미국 선박에 방해를 준다.

또 다른 전쟁의 이유로 매디슨 대통령은 영국이 프랑스 또는 프랑스의 동맹국들과 무역을 하지 못하도록 명령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매디슨 대통령은 국제법에 따르면 영국은 그같은 명령을 다른 나라에 내릴 권한이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매디슨은 동북부 지역의 적대적인 인디언 문제도 언급하고 영국령 카나다가 이들을 돕고 있다는 점을 시사했습니다. 대통령의 멧세지는 하원 외교 위원회에서 토론에 부쳐졌습니다. 죤 칼훈을 위원장으로 하는 이 위원회의 보고서는 이틀후 완성됐습니다. 칼훈 위원장은 전쟁 선포를 제안했습니다.

비밀 회의를 연 하원은 보고서 내용을 청취했습니다. 연방당원인 죠시아 퀸시(Josiah Quincy) 는 이 논의를 공개적으로 해야 한다고 제의했습니다. 그러나 그 제안은 거부됐습니다. 전쟁 선포 법안은 찬성 79반대 49로 통과됐습니다. 하원의 표결 결과는 찬성 19, 반대 13으로 좀더 근소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매디슨은 6월 18일 전쟁 선포안에 서명했습니다. 1812년 영국과 미국의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워싱턴의 지도자들은 모르고 있었으나 영국은 이보다 이틀전 미국의 무역 중립화 반대를 철회했었습니다. 그같은 철회는 몇가지 사건만 없었더라면 좀더 일찍 하달됐을수도 있었습니다.

막대한 정치적 압력을 받고 있던 영국의 스펜서 퍼씨벌(Spencer Perceval) 총리는 무역 중립화 금지 조치를 철회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기업인들과 무역업자들은 그같은 조치가 영국 경제를 파멸로 몰고 가고 있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러나 퍼씨벌 총리는 정책 수정을 단행하기 전인5월 11일에 총격을 받고 사망했습니다. 따라서 6월 8일 새 총리 리버풀(Lord Liverpool)경이 등장할때까지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로부터 8일후 리버풀 정부는 중립 무역 반대 조치를 즉각 철회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그것은 미국이 전쟁을 선포하기 불과 이틀전이었습니다. 선박이 유일한 통신 수단이었던 당시 영국의 그같은 조치는 때맞추어 전달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만약 1812년 봄 미국 대사가 런던에 있었다면 그는 영국이 정책을 바꾸려 하는 상황을 보고했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국 대사 윌리암 핑크니(William Pinkney) 는 일년 앞서 본국으로 돌아왔었습니다.

전쟁이 선포되던 날까지도 미국은 사실상 전쟁을 치를 준비가 너무 안돼 있었습니다. 미군 병력은 약 8천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서부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또 당시 세계 최강의 해군을 자랑하던 영국의 함정과 싸울 미국 군함은 불과 몇척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불리했던 현상은 전쟁에 대한 미국 국민들간의 분열이었습니다. 가장 강력히 반대한 세력은 북동부 세력이었습니다. 이곳 교회들은 전쟁이 선포되자 종을 울리고 국기를 내렸습니다. 매사츄셋즈, 로드 아일랜드, 그리고 코네티컷트 주는 자기 주의 군인들에게 중앙 정부군의 명령을 따르지 말도록 지시했습니다.

유럽에서의 전쟁을 경험해보지 않은 미국은 강력한 영국군의 세력에 오래 버틸수가 없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대부분의 영국 군인들은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소수의 병력만을 미국으로 파견할수 있었습니다.

미국은 군대 규모를 늘리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오랫동안 전쟁을 하지 않았으며 군대의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었습니다. 독립전쟁에 지휘관으로 참전했던 사람들은 이제 나이들고 지쳐있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전쟁을 해본적이 없었고 전쟁을 어떻게 하는지 몰랐습니다. 매디슨은 두사람, 즉 62세의 헨리 디어본(Henry Dearborn)과 63세의 토마스 핑크니(Thomas Pinckney)를 사령관에 임명했습니다. 다른 대부분의 장군들도 그와 비슷한 고령자들이었습니다.

군대 구성을 위해 충분한 젊은이들을모집하는데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의회는 2만 5천명의 병력을 늘리는 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러나 군에 들어가겠다고 찬성한 사람은 5천명에 불과했습니다. 서부 출신 의원들은 영국과의 전쟁에 사람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나설 것인지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처음 시도한 켄터키주에서는 겨우 4백명의 병력만 보충될수 있었습니다.

미국은 첫 공격에서 캐나다를 상대로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미국과 카나다 국경에는 2,500명의 영국군 만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네가지 작전이 수립됐습니다. 이중 첫번째 공격은 혁명전쟁의 연로한 군인 윌리암 헐(William Hull) 장군이 맡았습니다.

헐 장군과 그의 2천 병력은 오하이오(Ohio) 남부에서 미시간(Michigan)통치령의 디트로이트(Detroit)로 진군하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헐 장군 병력은 전쟁이 선포되기전에 300 km의 이미 행군을 끝냈었습니다. 헐 장군은 즉각 카나다 공격을 명령했습니다.

연로한 장군은 국경을 건너 말든(Malden) 에 있는 영국군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그곳 영국군 장군은 이에 잘 대비하고 있었고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헐 장군은 디트로이트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는 소규모 영국군 부대와 인디언들에 쫓겼습니다.

헐 장군은 강력한 군대와 충분한 물자를 갖고 있었지만 그는 디트로이트에서 영국군에 항복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헐 장군은 비겁자라는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됐습니다. 그러나 매디슨 대통령은 독립 전쟁에서의 공로를 고려해 그를 살리도록 조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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