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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설립에 마지막 열정 바친 토마스 제퍼슨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은1809년 백악관을 떠났습니다. 그의 국무장관이었던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이 대통령으로 당선됐습니다. 제퍼슨은 국가가 좋은 사람의 손으로 인계됐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버지니아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워싱턴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제퍼슨과 새 대통령은 자주 서신을 교환했습니다. 제퍼슨은 매디슨이 부딛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제퍼슨의 저택에는 많은 손님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모든 방문객을 환영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젊은이들이 찾아오는걸 특히 반가워 했습니다. 이들은 교육, 정부, 책, 과학 발전등을 논의했습니다. 제퍼슨은 그들의 질문에 대답했고, 공부를 더 하라고 조언했습니다. 제퍼슨은 교육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정부는 지적인 판단을 할수 있는 국민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버지니아에 보다 나은 교육 기관을 세우는데 마지막 여러해를 보냈습니다.

제퍼슨은 그의 생애 전체를 통해 교육에 관심이 깊었습니다. 그는 보다 나은 교육을 시키기 위한 여러가지 생각을 구상해 냈습니다. 그는 모든 국민이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누구나 똑같은 공부를 할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제퍼슨은 사람을 육체적인 노동을 하는 사람과 정신을 사용하는 사람 두가지로 분류했습니다. 그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처음에는 글을 읽는다든지 숫자를 계산한다든지 하는 간단한 교육을 똑같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두 그룹이 별도의 교육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노동 그룹은 농사를 짓거나 물건을 만드는 일을 배워야 하고 다른 그룹은 과학, 의학, 법률등을 배워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제퍼슨은 즉각 버지니아에 좋은 교육을 실시할수 있는 시설을 짓는데 착수했습니다.

일단의 동조자들은 제퍼슨의 집 가까이에 있는 샬롯즈빌(Charlottesville)에 대학교를 세우기로 결정했습니다. 제퍼슨은 즉각 학교 건설에 앞장서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는 학교 건물의 설계와 교육 과정을 수립하겠다고 제의했습니다. 그는 교육 전문가인 여러 친구들에게 편지를 써 조언을 구했습니다.

한 전문가는 제퍼슨에게 교과목에 종교는 포함시키지 말라고 조언했습니다. 제퍼슨도 여기에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종교를 공부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그것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최선의 것만을 할수는 없다. 우리가 관계하는 사람들은 다른 생각을 가질수도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대로 행동할 권리가 있다. 우리는 한번에 하나씩 단계를 거쳐야 한다. 우리 국민이 가장 좋은 일을 하게 하려면 우리가 할수 있는데서부터 시작해야지 할수 없는데서부터 출발하려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그들을 도울수 있는 시간이 언제인가를 관찰하면서 그들이 다음 단계로 갈수 있도록 함께 가야 한다.” 제퍼슨은 샬롯즈빌 칼레지의 교육 과정을 설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버지니아의 완전한 교육 제도를 위한 계획을 완성했습니다. 그는 3단계의 교육 제도를 제안했습니다.

첫 단계는 어린이들에게 읽기, 쓰기, 산수, 지리등을 가르치는 초등학교 제도였습니다. 이런 학교는 주 전역에 세워져야 하고 거주민들이 내는 돈으로 운영되도록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두번째 단계는 대학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고등학교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버지니아주 9개소에 이런 학교를 세우자고 제의했습니다. 이들 학교에서는 농업이나 과학 또는 기술을 가르치게 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교육은 주에서 비용을 충당하게 됩니다.

제 3단계는 능력있는 학생들을 위한 최고의 교육 기관으로써 주립 대학 (State Univeresity) 제도였습니다. 대학은 변호사, 의사, 교수, 과학자, 그리고 정부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형편이 좋은 집안은 이들의 학비를 자비로 충당하도록 했습니다. 주는 극빈한 가정의 자녀로 소수의 우수 학생에게만 학비를 대주게 돼있었습니다.

제퍼슨은 버지니아 대학교를 샬롯즈빌에 세울 것도 제의했습니다. 그는 이미 그곳에 학교 건설 사업을 착수하고 그것을 버지니아 대학교에 주겠다고 제의했습니다. 그의 교육 제도 설립안은 버지니아 의회에 제출됐습니다. 여러 의원들은 그 안을 매우 우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시에 그것을 반대하는 의원들도 많았습니다. 이들은 교육비를 충당하기 위해 세금을 인상해야 한다는데 반대했습니다. 주 의회는 그러나 그 계획의 일부, 즉 가난한 가정의 자녀들에게 학비 보조를 해주는 제도, 대학 교육을 위해 매년 만 5천 달라를 배정한다는 안등을 승인했습니다.

대학교가 어디에 세워져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았습니다. 다른 여러 도시들도 대학교를 유치하기 원했습니다. 최종적으로 샬롯즈빌이 선정됐습니다.

이 무렵 제퍼슨은 대학 건물의 설계를 마쳤습니다. 그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아름다운 건물에서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따왔습니다.

학교 건물의 설계는 워낙 뛰어나서 백년이 지난 후에도 학교 건물을 늘릴때 제퍼슨이 설계한 학교 시설을 변경하거나 건물을 철거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대학 건설을 위한 사업은 즉각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첫 학생을 받아들이기 까지에는 6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습니다. 제퍼슨은 매일같이 공사장에 나와 일의 진척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어떤 실수나 부실한 공사가 발견되면 즉시 이를 지적해 시정토록 했습니다. 몸이 불편해 현장에 가볼수 없을때는 집에서 망원경으로 공사장을 살펴보았습니다.

대학 유지비용은 계속 늘어났습니다. 제퍼슨은 자금 확보를 위해 주 의회와 싸워야 했습니다. 그는 또 최고의 교수들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미국 전역으로 보내 우수한 인물을 찾아보도록 했습니다. 그는 유럽에 까지 사람을 보내 교수를 알아보도록 했습니다. 드디어 1825년 3월 버지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가 개교했습니다. 대학교 설립에 열정을 쏟는 동안 제퍼슨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됐습니다. 그는 이미 82세의 고령이었습니다. 그는 류마치스와 당뇨를 앓고 있었으며, 가까운 거리밖에 걸을수가 없었습니다. 제퍼슨의 기억력도 쇠퇴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알았습니다. 그는 어느날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사랑하고 함께 살았던 사람들을 하나 하나 돌이켜 보니 마치 모든 사람이 죽어 넘어진 전쟁터를 보는 것과 같네.” 제퍼슨은 건강이 극히 악화되자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어떻게 묻어달라는 유서를 썼습니다. 그는 자기 집 아래 산자락에 간단한 묘지를 만들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묘지의 모양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그는 묘지에 다음과 같이 새겨주기를 원했습니다.

“여기 미국 독립 선언서와 버지니아 종교 자유 법을 작성한 사람, 버지니아 대학교의 아버지 토마스 제퍼슨이 묻혀있다.” 그는 묘비명에 버지니아주 지사, 미국 국무장관, 제 3대 대통령등 자신의 지위에 관해서는 쓰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아나 테리토리를 매입해 미국에 엄청난 영토를 늘려준 공적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왜 독립 선언이나 종교의 자유, 버지니아 대학설립의 업적등만을 묘비명에 새기도록 택했는지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1826년 7월 4일, 미국은 막 독립 선언 15주년을 축하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보스톤으로부터 죤 아담스 전 대통령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나왔습니다. 아담스는 마지막말로 ‘제퍼슨은 아직도 살아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스의 말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날 아침 10시 10분전 그의 친구 토마스 제퍼슨은 숨을 거두었든 것입니다.

위대한 두 인물이 사망했다는 소식은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독립 기념일은 애도의 날로 변했습니다. 제퍼슨은 그의 유언대로 조용한 산 기슭의 묘지에 다음날 묻혔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독립 선언서와 종교적 자유 의 전통속에,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버지니아 대학교에 살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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